조지오웰-'1984'와 무라카미하루키-'1Q84'

현재의 상상력은 미래의 현실이다. 꿈꾸는 자만이 미래를 새롭게 형성(形成)할 수 있다. 상상력 속에서 현재와 미래는 상호(相互)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측면에서 개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와 국가도 미래를 꿈꾸면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간다. 현재와 미래, 그리고 개인과 사회의 조화 속에서 미래를 꿈꾸는 자들이 시인이며, 소설가이고, 예술가들이다. 그래서 상상력을 지닌 개인은 시와 소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개인의 꿈을 사회와 국가의 미래와 조화를 이루어나갈 수 있다.

개인의 꿈을 문학이나 예술의 상상력과 결합(結合)해야 하는 이유는 개인과 사회가 마치 친구나 연인처럼 결코 서로서로 분리되어 있는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미래로 나아가거나 과거로 퇴보(退步)하는 상호 보완적이면서 상호 생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개인의 꿈과 사회의 현실이 서로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있음을 이야기하는 두 개의 소설이 있다. 하나는 조지 오웰의 ‘1984’(1949)이고, 다른 하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2010)이다.

‘1984’와 ‘1Q84’는 개별적인 “1984년”의 연대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조지 오웰의 ‘1984’는 그가 살고 있었던 1949년의 현실에서 미래를 꿈꾸는 하나의 문학적 상상력의 세계이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는 그가 살고 있는 2010년의 현실에서 미래를 꿈꾸는 또 다른 문학적 상상력의 세계이다. 그래서 ‘1984’와 ‘1Q84’는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적 현실의 세계에 의존(依存)하고 있는 동시에 근대성에 매몰되거나 혹은 탈근대성으로 나아가는 서로 다른 소설이다.

‘1984’와 ‘1Q94’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현실의 세계는 사회와 국가, 그리고 제국이 개인의 삶과 사랑, 그리고 상상력이라는 미래의 꿈을 지배하는 근대의 세계이다. 1949년과 1984년과 2010년은 모두 그 지배적인 언어를 통하여 사회와 국가, 그리고 제국의 지배자에 의해서 개인의 삶과 사랑, 그리고 미래의 꿈이 억압(抑壓)되고 파괴되는 세계이다.

그러나 그러한 근대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1984’에 등장하는 “윈스턴”과 “줄리아”의 사랑과 미래의 꿈은 ‘1Q84’에 등장하는 “아오마메”와 “덴고”의 사랑과 미래의 꿈과 다르다. “윈스턴”과 “줄리아”의 사랑은 파괴되지만,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은 새로운 미래의 세계를 만든다.

문제는 언어이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지배자의 언어에 포섭(包攝)되어 서로서로를 배반하고 미래를 포기하지만, “아오마메”와 “덴고”는 새로운 언어를 공유하면서 지배자의 언어에서 벗어나는 탈근대의 세계를 창출(創出)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1Q84’에서 개인의 사적인 언어를 통하여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사회의 공적인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은 존 쿳시가 ‘포’라는 소설에서 여성의 사적인 언어를 통하여 ‘로빈슨 크루소’가 지니는 남성의 공적인 언어를 넘어서고, 진 라이스가 ‘드넓은 사가소 바다’라는 소설에서 미친 여자의 사적인 언어를 통하여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지니는 정상인 여자의 공적인 언어를 넘어서는 것과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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