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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3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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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위에 현실을 놓을 것인가, 현실 위에 꿈을 놓을 것인가스펙 때문에 꿈을 잃어버린 20대들에게 보내는 또 다른 20대들의 비망록

취업의 기로에 놓인 많은 대학생들은 현실과 꿈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이 하고 싶은지 한 번씩 돌아보게 된다. 이번 기획에서는 현실적인 여건보다는 자신의 꿈을 좇고 있는 20대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번 기획을 통해 현실에 치여 묻어두거나 잊어버린 꿈을 반추해보는 계기를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나부터 변하자’결심 후 교사직 그만두고 봉사활동에 참여

정토회에서 제3세계 사람들에게 교육봉사하는 자원 활동가   송지홍 氏

   
△자원활동가 송지홍 씨

“내가 살아오면서 만들어낸 장벽을 부수지 않고서는 진정한 세상과 만날 수 없다”
자원 활동가. 제 3세계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위해 교육봉사를 하거나 구호 물품을 전달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고통 받는 이들이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송지홍 씨는 현재, 정토회에서 자원 활동가로써의 삶을 살고 있다.

정토회에서 모든 문제와 행복은 ‘나’로부터 나온다. 송지홍 씨는 이곳에서 자신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내면의 길을 거슬러 올라가자 그 자신의 마음과 조우(遭遇)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제 자신이 살아오면서 만들어온 장벽이 얼마나 두텁고 높았는지 깨달았어요.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그 어떤 문제도 풀 수 없음을 느꼈죠.”

수입이라고는 한 달에 5만원 남짓. “처음 이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다들 말렸죠.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 다니다가 갑자기 왜 이러냐고. 그래도 확신이 있었어요. 제 꿈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송지홍 씨의 꿈은 무엇일까. 그는 고3 때까지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 입시철이 되자 세상은 그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방황했다. 가고 싶은 학과가, 하고 싶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억울해졌어요. 12년을 학교에 쏟았지만 학교는 제게 꿈 하나 심어주지 못했다는 것에.” 그는 도대체 학교가 해준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문제는 대한민국의 교육제도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 때, 목표가 정해진거죠. 이 나라의 교육을 바꿔 보겠다는 것.” 적어도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찾아줄 수 있는 교육을 펼쳐보겠다는 결심으로 재수를 해 ‘서울대학교 과학교육과’에 입학했다.

대학 수업은 흥미로웠으나 허전했다. “탁상공론(卓上空論)만으로 진정한 교육 혁명을 이룩할 수 있을 지 고민했어요. 인생은 끊임없는 화두(話頭)의 연속이었죠. 또 다시 방황과 선택의 길에 맞닿았어요.”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할 지 현장으로 나갈지 고민 끝에 결정했다. 목동의 한 사립학교에서 과학교사로 일을 시작했다.  “세상은 당신이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변해야 하는 것은 내 자신”
현장에서 얻은 것은 하나였다. 무기력(無氣力). 교사들도 학생들도 모두 무기력했다. 그 속에 있으면 그 자신 또한 무기력해지는 것을 느꼈다. 결국 교사로 재직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일이 터졌다. 그 학교의 한 교사가 입시학원의 원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이 경찰에 포착(捕捉)된 것이다. 뉴스에까지 보도됐다. 해당 교사는 다음 날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그에게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동료 교사들과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식의 학교 분위기에 떠날 때가 됐음을 감지(感知)했다. “학교를 나오면서 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았어요. 결국 저도 똑같았더라고요. 서울대라는 학벌과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으로 나타나는 화려한 스펙으로 세상의 온갖 혜택을 다 누리며 편안한 삶을 살아온 거죠.” 이 나라의 교육을 바꿔보겠다 자신했지만 그 자신은 이미 실천할 수 없는 몸이었다.

개인이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하더라도 바뀌지 않는,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인지(認知)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부터 변하자.’ 그는 자신에게 실천력을 심어줄 수 있는 곳이 어딜 지 찾았다. “문득, 대학시절 다녀왔던 ‘인도 선재수련’이 떠올랐어요. 삶은 그대로 행복하다던 그곳의 가치관이 어찌나 간절하게 그립던지.” 정토회로 갔다. 무모했지만 그 자신에게 힘을 줄 것 같았다.

“당신은 멋진 사람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인터뷰가 있기 하루 전 날, 송지홍 씨는 후배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단다. 수화기 너머로 후배 녀석이 울먹이면서 말하더란다. 평화재단 사무실에 자리 하나 내 줄 수 없겠냐고. 더 이상 현실을 견딜 수 없다고. 명문대를 거쳐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후배다.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에 있음에도 현실의 무게를 감당치 못한 채 우는 후배를 보며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위치와 환경에 상관없이 청춘들은 고민이 많아요.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개인 안에서만 해결하려 하죠. 그러나 모든 아픔은 관계되어 있는 법이거든요. 개인의 문제를 사회 속으로 끄집어 내야해요.”
개인을 공동체에 열고 문제를 공론화하며 연대(連帶)를 이끌어야한다. 문제와 아픔은 함께 푸는 것이다. 혼자 아파하지 말라. 나의 문제는, 그리고 당신의 문제는 결국 우리 모두의 것이다. 그의 신념이다.

송지홍 씨는 말해주고 싶다. 자신이 가는 곳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당신은 엄청난 자질을 지닌 사람이라고. 또 보여주고 싶다. 부와 명예, 그리고 안정성으로 집약되는 이 시대의 목표를 맹목적으로 좇고 있는 청춘들에게. 당신이 쫓기 듯 걸어가는 그 길 외에 다른 길도 얼마든지 있다고. 때로는 삶의 두려움 속에서 허우적대는 젊음이지만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지 않은가. 그리고 여기, 미약하고 고단하지만 다른 길을 걷는 청춘이 분명히 있다고. 알려주고 싶단다.  내가, 그렇다고.

나의 청춘은 마음 가는 대로 펜 끝 닿는 대로

웹툰 작가 서 나 래 氏

   

“지금 아니면 못할 일들. ‘젊음’이라는 용기를 업고 마음껏 펼쳐보길”
확연(確然)한 꿈은 없었다. 단지 만화가 좋았다. 고3 시절에도 참고서 아래로는 만화책을 펼쳤다.

인터넷 보급이 급속도로 퍼져나가던 시절 웹에 만화를 연재하는 일이 시작됐다. ‘웹툰(Webtoon)’의 등장인 것이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웹툰 1세대 작가들의 작품을 보며 자랐어요. 그 때 ‘만화가’라는 오랜 꿈을 이룰 수 있는 희망도 같이 보았죠.” 2004년 여름의 일이다. 대학교 2학년 시절, 조금씩 그려왔던 만화를 들고 정식으로 홈페이지를 열었다. 친구들이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 홍보를 해줬다. 곧 방문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웹툰 2세대’의 첫 주자를 알리는 축포(祝砲)가 들렸다.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 즐거운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아직까지도 생소(生疎)한 ‘웹툰’을 업(業)으로 삼기까지 서나래 씨도 수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나 나온 답은 한 가지.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자기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즐기며 사는 사람은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고 굳게 믿어요.” 그녀는 휴학을 한 뒤 잠시 경험했었던 회사 생활에서 이미 직장에 다니는 것은 자신과 맞지 않음을 느꼈다고 한다.

한창 인터넷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던 시절, 서나래 씨에게 한 제안이 들어왔다. 연세대 내에 있는 MUNC’라는 단체로부터 가입 권유를 받은 것이다. ‘MUNC’는 학내 디자인에 능한 학생들이 모여 만든 ‘기획자 집단’이다. 이곳 구성원들은 수익을 창출(創出)하는 동시에 재능을 한껏 발휘(發揮)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서나래 씨 또한  ‘MUNC’의 멤버로써 학내의 디자인 관련 행사를 도맡았다. 홈페이지 오픈과 ‘MUNC’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 자기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말하는 서나래 씨.

그녀는 “만화와 디자인이 자기가 갈 길이라는 확신이 생기자 일이 더 재밌어 졌어요. 정기적이지 못하고 때로는 수익이 없을 수도 있는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죠. 내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일”이라며 “때로는 막막한 창작의 길이지만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내 길”이라고 강조했다. 

서나래 씨는 첫 연재를 시작했던 2004부터 만화와 함께하는 쉴 틈 없는 일상을 보냈다. 그러다 2009년, 그녀의 첫 슬럼프가 왔다. “더 이상 만화를 그릴 수 없을 정도로 심신이 지쳤었어요.” 어디론가 훌쩍 떠나보고도 싶었다. 마침 여행기를 써보는 것이 오랜 꿈 아니었던가. 자신이 원하는 선택에 이번에도 망설임이란 없었다. 당장 네팔 행 티켓을 끊었다. ‘낢이 사는 이야기’의 연재를 중단하고 올해 3월부터는 대학생들의 로맨스 이야기인 ‘낢에게 와요’를 선보였다. 경험담과 허구가 섞인 첫 서사적인 만화였다.

여행기를 성공적으로 끝내자 ‘기승전결(起承轉結)’을 고루 갖춘 스토리를 가진 만화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스토리를 가진 만화는 서나래 씨에게 맞지 않았다. 작품 자체는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다시는 서사가 있는 만화는 그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서태지의 열성팬으로도 유명한 그녀는 지난 8월 서태지 컴퍼니 측으로부터 환경 보호를 주제로 한 웹툰 연재를 제의 받았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라는 말의 현실화였죠.” 그녀는 그 제의를 받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OK’했다고. 그 순간 자신이 만화를 그린다는 것에 진정으로 감사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진정으로 행복해보였다.

“잊지 마라. 그 누구에게라도 20대는 단 한 번 뿐임을”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는 말한다. 삽질도 헛짓거리도 20대가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고. 그녀의 20대는 충동의 연속이었다. 만화를 그리고 정식 작가로 데뷔를 하기까지. 데뷔 이후에도 다양한 활동으로 입지를 굳히기 까지 모든 길은 자신의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고민하지는 않았다. “순간순간 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쪽을 택했어요. 거짓말처럼 운도 정말 좋았고요.” 서나래 씨는 자기가 즐거운 일을 재밌게 하면 만사가 저절로 풀리는 것 같다고 느긋하게 말한다.

때로는 대기업에서 높은 연봉을 받으며 일하는 친구들을 볼 때 마다 살짝 흔들릴 때도 있지만 그런 생각은 금방 날아간단다. 진정으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지론(持論)은 한 가지. 내가 즐거울 수 있는 일을 해라. 나의 행복은 세상이 아닌 내가 만드는 것이기에.

김보해 기자  boo@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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