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先輩(선배)에게 부친다

  봄이 훈풍을 타고 파싹 마른 일년생 잡초들의 흔들림으로 가득한 캠퍼스.
  우리들은 자유와 진리의 共感帶(공감대)에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무한한 가능성에 끝없이 도전해 보고픈 욕망을 억제할 수 없다.
  이미 기억 속에선 아득한 옛일이 되어버린 듯한 그 숨 가쁘던 입시의 긴장. 거의 모든 것이 ‘禁止(금지)와 不可(불가)’라는 부정적인 명제들 앞에서 孤獨(고독) 따위를 생각하며 그때  그때의 괴로움을 새삼스럽게 확대시키는 따위는 바보스러운 行動(행동)은 이젠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가파른 東岳(동악)의 언덕을 오르내린지도 벌써 한 달 남짓.
  인연과 우연. 그래, 이세상은 참으로 묘한 곳. 가슴으로 와 닿는 무엇인지도 모를 것들이 우리들의 발아래 굴림을 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긴긴 겨울을 잔인한 季節(계절)이라고, 4月을 잔인한 달이라고 누가 그랬나? 이제는 이런 사소한 상념으로 날을 보낼 수는 없다.
  겨울의 고통을 몰아세운 듯, 먼 山위의 눈도 이제는 자취를 감추고 고통의 눈도 함께 녹아 내렸다.
  젊었기에 타오르는 청춘을 발견하게 되고, 새삼스레 고독을 사랑하게 되었고 한편으론 現實(현실)에 대한 두려움까지 느껴본다.
  우리들은 풋내 나는 1년생이기에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에의 두려움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뛰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환상처럼 머리에 떠올린다. 대학생의 멋과 낭만보다 먼저 우리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우리들이 결코 위대하지 않은 평범한 人間(인간)으로 수많은 고통과 고민을 맛보아야 할 것이라는 사실.
  아직은 완전히 아물지 않은 작은 상처가 바람만 불면 쓰라리기에 우리는 또다시 작은 상처를 얻지 않도록 몸부림쳐야 한다.
  언젠가 아름다운 꿈을 꾸다 깨어나 안타까움으로 눈물 흘리던 한때의 슬픔처럼 다시 아름다운 꿈을 꾸기 위해 그따위 작은 상처쯤이야 넉넉히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작은 상처의 過去(과거)를 否定(부정)하고 未來(미래)를 肯定(긍정)할 줄 아는 우리. 또한 그것을 실행하는 자율성을 스스로 터득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마치 평균대위에서 날렵하게 묘기를 부리는 어느 소녀 체조선수와 같이….
  우리들은 졸고 있는 과정에서 깨어나는 과정, 그리고 깨어나는 의식이 불가피하게 허망한 모순에 부딪혀 깨어지지 않도록, 또한 관습에 의한 무의미한 동작을 깨달을 때까지 스스로의 반성을 시도하여 어떠한 고난에 봉착해도 표류하지 않는 理想的(이상적) 人間像(인간상)을 스스로가 추구해야 한다.
  사상의 부조리, 자유와 낭만의 이율배반적 요건으로 인한 反抗(반항)의 세계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不合理(불합리)를 명확히 인식하게 될 때까지 어쩜 우린 한 발짝도 옮길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모순과 意味喪失(의미상실)의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의 미로를, 無意味(무의미)의 미로를 벗어날 수 있을까?
  술을 마시고 소리쳐대는 대학생들에겐 물론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통행금지가 있다. 밝은 곳은 모두 빼앗겨버려 마치 굴속처럼 어두운 지하다방과 술집에서 몽롱한 의식 속에 담배와 시끄러운 음악으로 대학생, 아니 우리들은 이 행동의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꾸러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직은 겨울의 찌꺼기가 곳곳에 널려있는 東岳(동악), 이 언덕.
  파싹 마른 일년생 잡초들의 흔들림이 겨울의 찌꺼기를 떨쳐버릴 수 있으면 이내 東岳(동악)에 개나리, 진달래라도 필수 있겠지.
  假說(가설)이 항상 假說(가설)로만 남는다면 그 가치는 없다. 가설이 眞理(진리)로 굳어질 때 우리는 그 가설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며, 또 다른 가설이 진리로 굳어진 가설에 도전할 때 우리는 발전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봄이 고개를 디미는 4월초의 東岳路(동악로). 1년생 잡초의 흔들림처럼 이젠 우리도 작은 상처와 관습을 바람에 날려버리고 출발선에 선 마라톤선수처럼 自由(자유)와 眞理(진리)의 의미로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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