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가 다 끝나고 광화문으로 가는 버스를 탔을 때 아침에 오던 비는 이슬비로 변해있었다. 종로1가에서 내려 길 건너편에 있는 광화문 서점 쪽으로 가면서 안주머니에서 초대권을 꺼내보았다. 초대권 뒷장 하얀 여백에 작고 예쁜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초대>
  안녕하세요.
  추석에 송편 많이 드셨는지요.
  다름이 아니고 아주 우연스럽게 이런 기회가 생겼어요. 저희 과 친구가 이번 제7회 공연에 출연한답니다. 축하하는 뜻으로 표를 두 장 구했어요. 시간 내실 수 있으시면 함께 구경 가지 않으시겠어요?
  Yes=10월 21일 오후 6시 5분 광화문 서점으로.
  No=표를 마음대로 처리하셔요.

  장소를 확인한 ㄱ은 시계를 보았다. 그녀의 약속장소는 항상 서점이었다. 서점이 커피값도 들지 않고 또 기다리기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 그녀의 말이었다. 그래서 매번 책방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책방 안에는 사람이 적었다. ㄱ은 신간서적난에 다가가 여러 가지 책을 뒤져보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 신경은 문소리가 날 적마다 그쪽으로 쏠렸다. 약속시간이 오분 정도 지났을 때 ㄱ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시 그 초대권을 꺼내 보았다. 그리고 살 것이 없는 척 태연스레 밖으로 나와 그 서점의 간판을 보았다. 틀림없는데… 약속시간은 언제나 철저히 지키던 그녀였다. ㄱ은 다시 서점 안으로 들어가 이번에는 문고판이 진열되어 있는 곳에서 책을 뒤적였다. 한 시간이 지났을 때 ㄱ은 조그만 문고판책을 하나 사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밖은 어둑어둑했다. 발걸음을 옮기며 초대권을 두 조각 네 조각으로 나누어 길 위에 흘려보냈다.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어둠속에서 이렇게 미친놈처럼 혼자 웃는다는 것이 ㄱ은 무척이나 유쾌하다고 느꼈다. 동네 아래에 있는 조그만 포장마차가 보였을 때 ㄱ은 오늘일은 다 잊어 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때 묻은 포장을 오른손으로 걷어 올리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주인남자에게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요즘 잘 됩니까?’
  ‘예 덕분에 잘 됩니다. 뭘로 드시겠읍니까?’
  ‘우선 뜨뜻한 오뎅이나 주십시요.’

  한쪽 구석에서 한 사내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뜨뜻한 오뎅이 앞에 놓이자 ㄱ은 소주를 가져다 따라 마셨다. 두 잔째 비우고 한잔 더할까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한쪽 구석에 있던 사내가 불쑥 말했다.

  ‘형씨! 친구 있소?’
  ‘네?’
  ‘친구말이요. 친구!’

  이상한 사람도 다 있군 젠장! 처음 보는 사람에게 친구가 있느냐 질문을 받은 ㄱ은 눈앞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카바이트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친구라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친구? 친구? 얼떨결에 빈잔에 소주를 채웠다.

  ‘있으시겠지, 있어. 사람은 누구나 다 친구가 있는 것이니까…암…허나 그건 가짜의 우정에 묶인 친구요.’

  그자는 술을 한숨에 벌꺽 들어 마셨다. 그자 앞에 있는 소주병에는 거진 비어 있었다. ㄱ도 보란듯이 술을 입에 부었다.

  ‘사랑! 사랑해보셨수?’
  술병 앞에 떨구고 있던 고개를 획 젖히며 ㄱ에게 물었다.

  ‘네?’
  ‘사랑! 사랑말이요. 여자와 사랑말이요.’

  ㄱ은 다시 카바이트불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소주잔을 들고 카바이트불빛에 왼쪽 눈을 감은 채 투명한 술을 비쳐보았다. 불빛이 부풀어 퍼졌다. 이번엔 친구대신 사랑이란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친구? 친구? 사랑? 사랑? 사랑? 과연 나는 친구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진실되게 나의 마음을 보여준 적이 있는가? 우리는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친구일까? 사랑? 영주? 내가 그녀를 사랑 한다고?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그녀와의 키스! 그리고 나는 사랑한다고 말했지. 그게 진심일까? 그건 일시적인 감정때문이란 말인가? 과연 그럼 진실한 우정과 사랑은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나의 마음은 위선이었나? 사랑? 우정? 젠장!

  ㄱ은 다시 술잔을 들어 입에 부었다.

  ‘그건 위선입니다. 위선! 첫번째 남을 속이는 거짓이요, 둘째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짓입니다. 벌거벗은 우정과 사랑을 맹세한다고 남과 자기 자신에게 말하지만 그건 모두 거짓입니다.’

  ㄱ은 자기마음을 들어보고 있는 듯이 말하고 있는 것에 마음이 뜨끔했다. ㄱ은 어색한 태도를 감추려는 듯이 다시 술 한 잔을 들고 그자에게 말했다.

  ‘형씨는 꼭 인생에 도통한 사람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럼 이 세상에는 진실한 우정과 사랑이 존재치 않는단 말요?’
  ‘네! 없읍니다. 하나도 없읍니다. 단 한가지만 빼놓고…’
  ‘그게 뭐요?’
  ‘계약!’
  ‘계약?’
  ‘네! 서로의 계약에 의해서만이 오직 진실한 우정과 사랑이 이루어 질수 있읍니다.’
  ‘아니 어떻게요?’
  ‘우리는 여태까지 우정과 사랑에 대해 겉만 계약을 해온 셈입니다. 그러나 이 계약에는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 즉 다시 말해서 마음까지 진실한 친구가 될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삼자가 증인이 되어주면 모두가 다 끝나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 정말 진실한 우정과 사랑이 될 수 있소?’
  ‘정 의심나거들랑 한번 실험해보슈’
  ‘실험? 실험?’

  ㄱ의 술병도 이미 바닥이 보였다. 빈 술잔을 응시하고 있는 ㄱ의 머릿속에는 그자의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후 ㄱ은 잃어버린 것을 찾은 듯이 소리치며 말했다.

  ‘당장 해봅시다. 당장에 당신하고 해봅시다. 자 당신하고 계약합시다.’
  ‘그거 좋습니다. 사실 나도 형씨와 진실한 우정을 맺고 싶었읍니다.’

  그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포장집 주인이 선뜻 자기가 증인이 돼주겠다고 응해왔다. 그렇게 해서 서로 떨어져있던 두 사람은 가운데로 자리를 옮겨 서로 통성명을 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처음 형씨를 보는 순간 형씨와 나는 무슨 인연이 있구나하고 짐작했읍니다.’ 하고 그자가 말했다.

  ‘나도 처음에 그런 것을 느꼈읍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ㄱ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자는 가족이야기며 직장에 있는 상관에 대한 불평 같은 것을 늘어놓았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ㄱ은 그자야 말로 정말 훌륭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포장마차주인이 이젠 들어가야 될 시간이라고 말했을 때 그자는 ㄱ에게 자기집으로 가자고 제안해 왔다. 그 말에 ㄱ은 감격해 자신도 모르게 먼저 자기의 하숙집으로 가야된다고 우겼다. 술값을 내겠다고 한참동안 서로 말리면서 머뭇거릴 때 ㄱ은 정말 이자는 진실한 친구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럼 술값은 자기가 내고 오늘 밤은 형씨집에 가서 다시 한잔하자는 말에 ㄱ은 그게 좋겠다고 말했다.
  ㄱ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젯밤에 대한 기억은 희미했다. 집 앞 가게에서 외상으로 술과 오징어를 사가지고 그자와 하숙방 안에까지 들어온 것은 기억이 났으나 그 후의 일은 도무지 생각이 안 났다. 변소를 가야겠다고 일어섰을 때 ㄱ은 책상위에 있던 많은 책과 벽에 걸려있던 단 한 벌의 신사복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순간 ㄱ의 머릿속에서 어젯밤의 그 사람과 없어진 물건들로 빠르게 움직였다. 거의 동시에 책상 위에 펼쳐있는 노트를 발견했다.

  ㄱ형!
  우린 어제 굉장한 실수를 했소이다. 계약서에 기한이 빠졌단 말이요. 다음엔 계약서에 기한을 꼭 잊지 마시요. 그럼 안녕!
  진실한 친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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