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는 근대 지성 대변하는 민족의 자존(自尊)”

한국 근현대사 문학을 논하는데 있어 우리대학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대학의 문학전통은 매우 깊다. 혜화전문학교 시절부터 만해 한용운, 서정주로 시작해 문학의 거대한 줄기를 형성한 동국 문학의 맥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이번 호부터 총 7회에 걸쳐 우리대학의 문학전통을 살펴본다. 첫 기획은 동국문학의 젖줄로 불리는 만해 한용운의 세 가지 삶을 조명한다.

<연 재 순 서>

  1. ‘님의 침묵’의  한용운
  2. 질마재 신화의 서정주
  3. ‘승무’의 동탁 조지훈
  4. 목가적 서정시인 신석정
  5. ‘낙화’의 신화 이형기
  6. ‘농무’의 신경림
  7. ‘태백산맥’의 조정래

동국대와 한용운의 인연

불멸의 한국인, 만해 한용운은 1879년에 태어나  1944년 66세로 입적할 때까지  구도와 실천의 삶을 살았다. 그는 자유·평화·평등·생명의 존엄을 지킨 선사, 독립운동가, 시인으로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이 같은 업적을 갖고 있는 한용운은 동국대 제1회 졸업생이었다. 한용운은 동국대의 전신인 명진학교(1906)의 단기과정인 보조과 출신이다. 한용운은 1908년 봄에 일본 조동종 대학(현 고마자와 대학)으로 유학을 갔지만 6개월 만에 귀국했다.

귀국한 한용운은 1908년 12월, 원흥사(동국대 최초 학교터)에 명진측량강습소를 3개월 과정으로 개설하여 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불교근대화, 민족운동에 매진하였다.

동국대와의 인연은 1918년 동국대 전신인 중앙학림의 동창회인 일심회(一心會)초대 회장으로 6개월간 역임함으로 인해 이어졌다. 3.1운동 당시에는 중앙학림의 학인을 자신의 거처로 불러 3.1운동에 나설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1924년에는 동국대 출신들이 주역인 조선불교청년회의 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1930년에는 항일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의 당수로도 추대하였는데, 이 추대에는 중앙불전의 제1회 졸업생들의 역할이 컸다. 직후 학생들은 한용운을 학장으로 추대하였으나(1932.5), 일제는 인가를 하지 않았다. 동국대 학생들은 한용운을 정신적인 지주로 따랐다.

이처럼 한용운은 동국대 학생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이었다. 한용운의 청년 승려들에서의 인기는 1932년 초, ‘불교’지에서 행한 조선불교 대표 인물 선정에서 477표 중 절대 다수인 422표를 얻어 1등을 한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같은 한용운의 사상에 대해서 조지훈은 “혁명가와 선승과 시인의 일체화”라는 고전적인 견해를 밝혔다. 이 글에서는 조지훈의 견해를 참고하면서 독립운동가, 불교개혁가, 문인으로서의 한용운 사상의 구조를 요약한다.

독립운동가로서의 만해
 
한용운의 삶은 민족운동의 최일선을 지킨 민족의 자존이었다. 그는 고향 홍성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비참함을 보았다. 그는 나라의 운명을 좌시할 수 없어 의병에 참가하였다. 출가 후에도 용솟음치는 열정으로 민족운동의 대열에 뛰어 들었다.

한용운의 민족운동의 첫걸음은 임제종운동(臨濟宗運動, 1911)의 주도로 나타났다. 임제종운동은 일본불교(조동종)가 한국불교를  일본불교로 개조함에 저항한 불교운동이다. 이 때 한용운은 전라도, 경상도 일대의 승려들을 추동하여 그 반대 운동에 나섰다. 이로써 한국불교가 민족불교의 자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후 한용운은 불교의 자주화를 주장하면서, 3.1운동(1919)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불교계 대표로 3.1운동 민족대표(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그는 기독교, 천도교 지도자와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한용운은 3.1운동을 성사시켰고,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추서하여 3.1운동의 방향을 정립했다. 그는 옥중에 수감 중에도 일제의 회유를 물리치고, 추상같은 절개를 지켰고, ‘조선독립의서’를 작성하여 상해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게재했다.

출옥 후는 민립대학 설립운동, 신간회운동, 광주학생운동 등의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대다수의 지성인이 친일행보로 전향해 갔지만 그는 결코 지조를 꺾지 않았다.이렇듯 그의 정신과 기개는 민족의 사표이었고, 매서운 지조는 민족 지성의 표본이었다.

불교개혁가로서의 만해

백담사에서 스님이 된 그는 불교의 사상을 체득하고 산중불교에 매인 불교의 문제점을 파악해 불교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즉 불교가 민족불교를 구현하면서 시대의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런 소신에서 1913년에는 ‘조선불교유신론’ 을 발간했다. 이 유신론에서 불교의 개혁을 과감하게 주장하고, 새 불교로 나아갈 것을 역설했다. 그는 산중불교, 승려중심의 불교에서 도회지 중심의 불교, 대중 중심의 불교로 나갈 것을 강조했다.

즉 한용운은 대중불교론(大衆佛敎論)을 주장했다. 만해의 불교개혁은 팔만대장경을 요약한 ‘불교대전’의 발간에서도 나온다. 3.1운동으로 옥에서 나온 후에도 불교개혁 열정은 쉼이 없었다. 그는 선 부흥을 위해 설립된 선학원(禪學院)에 거주하며 역경 단체인 법보회를 조직하였다.

만해는 불교 자주화의 일환으로 불교계 통일운동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일제의 불교정책에 긴박당한 불교계를 불교자주의 무대로 끌어내는 방안이었다. 그리고 1930년대 초반 ‘불교’를 펴내던 ‘불교’사의 사장에 취임해 안이한 편집 원칙을 바꾸어 불교계 모순에 비판을 가했다.

이때부터 ‘불교’지는 식민지에 안주하였던 사찰 및 승려에 대한 준열한 비판을 하였다. 한용운이 30대에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고, 50대 후반까지 불교개혁을 위해 열정적으로 행보한 것은 일본 불교에 밀리고, 전통과 문명의 사이에서 혼미했던 한국 불교의 취약성을 극복하려 한 것이다.

문인으로서의 만해

한용운의 위대성은 문학에서도 뚜렷하다. 그의 문학 활동은 시, 시조, 소설, 수필, 한시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가 이처럼 다양한 장르에서 창작을 하였고, ‘님의 침묵’과 같은 불멸의 시집을 낼 수 있었음을 그가 지닌 환경으로 보면 특이하다.

한용운은 제도권의 학교를 제대로 다닌 적이 없고, 문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용운이 뛰어난 문학적 성과를 이룬 것은 그의 한학실력과 도전정신에서 찾아진다.한용운은 출가하기 이전,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한학 수학과정에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전한다.

18세 무렵에는 서당의 훈장이 되었다. 때문에 한용운이 유년시절에 익힌 한학 공부가  문학적 소양이 되었다. 한학은 동양사, 동양철학이 집대성된 산물이다. 이런 한학공부가 만해 문학의 근본이었다. 다음으로 한용운은 근대화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의식이 있어, 일본을 거쳐 수입된 새로운 문학사조도 수용했다.
한용운의 문학적 소양에서 그의 도전정신을 빼놓을 수 없다.

1925년 백담사에 칩거하며 ‘님의 침묵’을 창작한 것은 남다른 도전정신에서 기인한다. ‘님의 침묵’에 수록된 88편의 시를 짧은 기간에 완성해 출판한 것은 도전정신으로 가능했다.

만해의 이 같은 문인으로서의 특성은 인문학을 상징하면서 근대 지성을 대변한다. 그러나 만해는 문학을 위한, 작가가 되기 위한 글은 결코 쓰지 않았다. 그의 글쓰기는 주체할 수 없는 자아의식에서 나온 살아 있음의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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