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 담당한 수업 중 하나를 분반(分班)하게 되었다. 수강신청을 받아보니 ‘팀 발표 중심’수업으로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적정 인원수를 초과했기 때문이다. 한 팀을 5명으로 구성하고 팀별로 최소한 2회 이상 발표 기회를 부여하며, 동시에 강의와 특강 등을 진행하기 위한 최대 인원을 40명으로 보았다. 단순히 이론과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수업에서 학생 스스로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창의적이며 협력적’인 수업을 위해서는 수강인원이 적을수록 좋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요구다. 강의실 사정도 있고 재정적 추가부담도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한 것이 분반. 80명 전후의 학생들을 두 반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분반기준이 문제였다. 학번을 기준으로 나눌 수도 있고, 학생들의 전공을 기준으로 적용할 수도 있었다. 내 경우는 전공을 택했다.

통상 분반 필요가 있을 때 적용하는 기준이라고 듣기도 했다. 따라서 정치외교학 전공학생과 정치외교학 복수전공 학생을 구별하여 반을 나누었다. 그러자 일부 학생들이 항의성(?) 전화를 해왔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의 반이 결정됐다는 것이다. 그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선택권을 제한받은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보면 학생들의 이의제기가 맞다. 자신들이 차별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차별은 불가피하다. 해당 수업의 분반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문제는 기준. 분반할 때 어떤 기준으로 학생들을 구별, 아니 차별 하느냐였다. 고려할 수 있는 기준엔 여러 가지가 있었고 내 경우는 그 중 전공을 사용했다.

전공과목을 강의하는 입장에서 해당 전공을 우선으로 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놓고 분반하라고 하면, ‘당연히’ 해당 전공을 우선으로 하는 학생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 즉, 분반 과정에서 정치외교학 전공 학생들에게 ‘특혜(特惠)’를 주어야 한다. 항의성 전화를 해온 학생들에게 전공 학생을 우선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설명을 했더니 모두 수긍했다. 물론 이런 선택을 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다. 분반 과정에서 발생한 ‘차별’은 합리적인 것이다.

왜 차별해야만 하는가? ‘희소성(稀少性)’ 때문이다.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의 수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많다면 누군가를 차별해야만 한다. 바로 ‘희소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특혜를 받은 사람과 특혜를 받지 못한 사람 모두가 승복할 수 있는 기준이다. 특히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동의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불공정하다.

‘정의(正義)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것을 올바르게 분배한다.” 올바르게 분배하는 것은 공정하게 차별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되면 차별받는 사람들이 억울해 하지 않는다. 당연히 받아야할 차별이기에 동의할 수 있다.

그래야 공정(公正)한 사회다. 공정한 사회의 기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장관의 딸’로 태어난 것이 특혜의 이유라면 장관의 딸로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억울하다. 차라리 ‘공정한 사회’라는 말이나 하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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