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불빛처럼 벅찬 편지였다. 또한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통고로 느껴지면서도 전혀 당황스럽지 않고 즐겁기까지 했다. 그녀는 가벼운 흥분으로 아무것도 눈치 챌 수 없는 그 편지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보았다.
  미림양-
  당신의 이름과 주소를 찾아내기 위해 난 이틀간을 안타까이 보냈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동그란 숲을 연상시킵니다. 지금부터 당신에게 아름답고 유쾌한 여름방학을 보내도록 권유하고자 합니다.
  당신도 이와 똑같은 형식의 편지를 받은 후 이틀 안에 당신과 전혀 무관했던 사람의 사랑스러운, 또는 멋진 이름을 찾아 보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축복의 번호 23과 행운의 날 수요일을 갖게 됩니다. 난 스물두번째의 행복한 사람으로서 누군가로부터 토요일에 쓴 편지를 받았습니다.
  당신이 축복의 번호일 또는 행운의 요일에 어두운 층계 위를 찾으면 당신은 어떤 외로운 사람을 만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전혀 뜻밖의 친구를 얻는 것은 신의 축복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삶은 역시 사람 속에서 사랑에 멱 감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다.
  자, 그러면 다음과 같은 요령으로 당신을 어두운 층계 위 캔들파티에 초대합니다.
  취지·혼자서 날던 날개의 어둠을 밝히고, 허물어진 세계의 안쪽에서 인간을 만나기 위하여.
  준비물·양초 한 자루와 샴페인 1병, 꽃 한 송이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무엇.
  어두운 층계 위·약도는 편지 뒷면에 있습니다. 당신도 그대로 옮겨주십시오.
  당신은 언제든지 날 저문 어두운 층계 위를 찾을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미림은 편지지의 접혔던 부분을 손바닥으로 곱게 펴서 일기책 갈피에 끼워두었다. 그리곤 누구에게도 비밀스럽게 하기로 했다.
  미림은 저녁식탁에 일찍 빠져나와 막내삼촌 방으로 건너갔다. 퀴슥한 냄새로 널려있는 양말, 재떨이 목탄지 등을 건중 건중 밀어 놓으며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한다.
  아! 마침내 찾았다는 듯이 미림은 작은 엽서를 집어 들고 흔들어보며 흐트러져 있는 글씨 들을 들여다본다. 서울 종로구 효자동 400의 30호, 서정길, 점점점으로 이루어진 그 흐린 글씨들은 자유,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중앙청 뒤의 플라타너스가 우거져있고 언제나 정결하고 고적한 동네에 살고 있다. 아무튼 그녀는 그가 멋진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미림은 어린왕자 편지지를 찾아들고 스탠드 밑에서 정성들여 편지를 썼다. 12색 볼펜으로 그림도 그려놓고 독특한 모양으로 접어 납작한 봉투로 살며시 밀어 넣고 풀칠을 했다.... 당신은 축복의 번호 24와 행운의 날 금요일을 갖게 됩니다. 난 23번째의 행복한 사람으로서 누군가로부터 수요일에 쓴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녁거리는 땀 흐르는 얼굴처럼 끈끈하고, 여자의 우울마냥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미림은 쇼윈도우에 진열된, 때 묻지 않아 부끄럽지 않은 女子(여자)의 속옷들을 바라보며 도로 확장공사로 부산한 큰길을 빠져나왔다.
  하늘거리는 물빛 원피스 자락을 매만지며 그녀는 문득 아침에 온 준수의 전화가 마음에 걸린다.
  ‘미림이, 오늘 참 눈부시다! 어디 갈까?’
  ‘어디라니?’
  ‘교외라든가, 풀장이라든가, 싫음 에어컨 가동 중인 다방이라든가, 왜 싫어?’
  ‘아아니, 그냥 몸이 좀 불편해서... 아아냐, 사실은 집에 일이 있어. 오늘은 미안.’
  시무룩해서 수화기를 떨어뜨리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미림은 미안스럽게 후회스러워 죽겠다. 사실 같이 올수도 있는 건데 나두 참.
  오늘 오후 그녀는 빨간 양초 한 자루와 샴페인 1병과 노란 종이꽃과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매화(하얀 고양이)를 안고 축복의 23일, 행운의 수요일에 어두운 층계 위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곳엔 언제나 빨간 촛불이 해바라기 무늬 벽에 가득 꽂혀 있고, 한가운데 놓인 둥그런 테이블위엔 가져온 갖가지 꽃이 화병에 소담스럽게 담겨있고, 둘레엔 조용한 얼굴로 웃는 정겨운 사람들만 있겠지. 네가 23번째니까 적어도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이 스물두명은 있을 거야. 내가 촛불을 켜들고 들어서면 그들은 샴페인을 터뜨리며 기뻐하겠지...
  미림은 약도를 펴들고 로우터리에서 길을 찾아 비탈진 길을 따라 올라갔다.
  S여대의 숲이 멀리 보인다. 구름빛같은 여름저녁은 밤보다 긴 것만 같다. 잠시 후에 S여대 맞은편 길가에서 아방가르트 화실이 눈에 들어왔다.
  미림은 다시 편지를 펼쳐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 곁에 있는 조그만 흙빛나무문을 발견했다.
  그녀는 팔랑팔랑 뛰어가 입구를 살핀다. ‘어두운 층계 위’란 하얀 글씨가 박힌 흙빛문을 밀고 들어서자, 어두운 층계가 가파르게 엎드려 있고, 층계꼭대기에 맑은 유리문이 있었다.
  미림은 미소를 지으며 매화를 안은 채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실내는 사설도서관처럼 칸칸이 막아놓고, 테이블마다 연보라빛 등이 대롱대롱 매달린 아래 남녀가 쌍쌍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곳은 평소에 보던 그런 레스토랑과 조금도 다른 곳은 아니었다. 그리고 친근감 느낄 얼굴도 없고 저들마다의 이야기에 몰두해 있을 뿐이다.
  그녀는 피식 기운이 빠지고 참을 수 없이 부끄럽고 외로와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마치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것처럼 휘둘러보곤 황급히 어두운 층계를 타박타박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뜨거운 손이 그녀를 돌아 세운다.
‘어머! 우리과 22번 아네요!’ ‘미림씨, 제가 좀 지나쳤나봅니다. 이제 850일간의 짝사랑을 고백해도 나무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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