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지원공연 계기로 노래 운동시작

  이번 노동자신문 창간 1주년 맞이 노래 한마당에 당당하게 대학생 노래꾼으로 출현한 김영남<고려대·간호학과4>양을 만나보았다.
  제1회 통일노래 한마당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고 현재 서울지역 대학 노래패(서대노협)에서 기능, 연구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고대 노래패 ‘노래얼’의 회원이기도 하다.
  이번엔 그가 속한 서대노협에 대해서는 “노래가 대중화되기 시작하고 학우들의 문화수준이 높아지면서 노래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많아졌어요. 대문연(대학생 문화예술운동연합)이 단일한 운동대오를 갖추고 예술, 문화지도의 통일성을 담아내기 위해 장르별로 나눌 필요를 갖게 된 거죠. 저희 서대노협은 2장르 중 하나로 각 학교 동아리 노래패로 구성되어 있는 가장 결속력도 강하고 열심히 활동하는 곳입니다”라고 설명한다.
  89년 4월 연대에서 발족식을 가진 서대노협은 초반엔 사람을 조직하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학생운동의 중요한 부문운동의 하나로 이렇게 자리 잡아 나가고 있으며 14개 노래패에서 34개 노래패로 늘어났다”며 함빡 웃음을 짓는다.
  “노래라는 매체가 갖는 가장 큰 특성은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공감대 형성이 쉽고 현장에서 요구하는 분위기에 맞게 띄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선전선동활동과 함께 노래의 재생산 구조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죠. 통일노래한마당이 점차 자리 잡아오면서 대학생들에게 커다란 노래생산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외국의 혁명가요에서 모티브를 따오거나 일부 뛰어난 작곡자에게만 의지하는 실정이었지요. 그래서 저희는 작곡단 구성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노래운동이 부문운동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80년대 초반엔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가 시위가 될 만큼, 이를테면 학생 운동과 기득권포기라는 공식이 성립되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그때는 노래의 기교보다는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 처절함이 묻어나오는 노래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운동이 표면화되면서 노찾사 등 사회노래의 출현 각 대학 노래패의 활발한 활동으로 대중들의 수준이 높아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바탕위에서 이젠 ‘감동’을 줄 수 있는 노래가 필요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그도 앞으로의 전망을 노래운동으로 설정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사실 저 역시 처음엔 방관자 정도였지요. 그러나 전교조가 움트기 시작할 무렵 신촌 신성극장에서 전교조 지원공연을 한 적이 있었어요. 며칠을 집에도 못 들어가고 고랑내 풍기며 공연하면서 무척 힘은 들었지만 ‘이것이 바로 내일이다’라고 생각했죠.”
  짱구머리에 둥근테 안경을 쓰고 동분서주하는 그는 건강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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