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고 싶었던 불꽃

전태일.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청계천 피복 공장 노동자. 여섯 살 무렵부터 시작된 거지 생활, 신문팔이와 구두닦이를 거쳐 열일곱 살에 평화시장 피복 공장에 견습공으로 취업. 그는 밑바닥 인간이었다. 그의 말대로 ‘주인 있는 개보다 천한 인간’이었다.

그는 1948년에 태어나서 스물세 살 되던 1970년에 노동자도 사람임을 부르짖으며 분신(焚身)자살하였다. 우리는 오해하기 쉽다. ‘희망이 없는, 지지리도 불쌍한 어떤 청년이, 자신의 절망을 못 이겨, ‘욱!’ 하는 마음으로 제 몸에 불을 질렀겠지.’라고.

그럴까? 아니다. 그일의 죽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밖에는 울 줄 모르는 우리들의 비정(非情)한 가슴을 두들긴다. 그의 죽음은 동학혁명이나 삼일운동에 버금가는 사건이다.

1960년대 말 청계천 피복 공장의 노동 환경은 참혹(慘酷)하였다. 작업장은 8평 정도. 작업 기계가 꽉 들어찬 비좁은 공간에서 32명 정도의 소년 소녀들이 일을 한다. 대개가 열여덟 살 정도의 나이. 심지어 열서너 살의 소녀들도 많았다. 천장 높이는 1.5미터 정도. 기름 냄새, 땀 냄새, 옷감을 자를 때마다 생기는 먼지 속에서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휴식 없이 일해야 한다.

1970년 당시, 보조는 월 1,800원에서 3,000원, 미싱사는 7,000원에서 25,000원, 재단사는 월 15,000원에서 30,000원까지 받았다. 열서너 살짜리 어린 소녀들이 받는 하루 70원꼴의 보수로는 점심도 먹을 수가 없었다. 풀빵 몇 개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작업하였다.

전태일은 혼자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고 ‘바보회’를 조직하여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저항하였다. 노동청과 언론사를 찾아다니며 비인간적 실태를 고발하였다. 그러나 관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신문 기자들마저 들은 체하지 않았다. 협박과 회유 때문에 동료들마저 기운이 꺾여만 갔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닫힌 문 앞에서, 전태일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자기 자신의 고통 때문에 목숨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한창 뛰놀아야 할 나이에 시들어 가는 어린 여공들이 사람 대접 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짓밟히면서도 굽실거리는, 우리들의 노예 근성을 일깨우기 위한 사자후(獅子吼)였다.

1970년 이후의 민주화를 향한 뜨거운 투쟁(鬪爭)은 전태일이 과거의 우리 자신이 ‘노예’였음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태일을 독기 품은 혁명 투사로 보는 것은 그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뼈저리게 체득한 ‘순수’한 사상가였다. 늘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며 소설 습작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정 많고 마음 여린 청년이었다.

“나는 ···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그러한 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의 공책에 적힌 글이다. 중생이 병들어 있으므로 나도 병들어 있다는 유마거사의 모습이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비천(卑賤)해 보이는 전태일에게서 성자의 모습을 꿰뚫어 본 이는 조영래 변호사였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도피 생활을 하는 도중이었던 1974년에 이 책을 썼다.

우리는 전태일도 기억해야 하지만, 조영래 변호사의 거룩한 삶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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