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시작법으로 현실 깨달음 시도

▲ 당선소감
임화인 <서울 시립대 경제학과>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문학은 이 엄혹한 현실에 하나의 희망임을 나는 믿는다. 그 믿음이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나를 잡아끈다. 그것은 힘겨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한다. 문학의 희망, 삶을 희망을 위해, 그래서 좋은 글을 만났을 때 나는 기쁘다. 왜! 그들에게서 삶의 희망은 분명 싹터 오르고 있지 않는가? 나는 항상 그들 곁에 있을 것이다.
  성권형께 감사한다. 재현에게도, 그리고 내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이것이 작은 기쁨이었음 좋겠다. 그들을 위해 술 한 잔 살 수 있는 지금, 나는 무지 행복하다.
  “얘들아 망가지러 가자”


▲ 심사평
홍기삼 <국문과 교수․문학 평론가>

  당선작 “깨달음의 詩學(시학) 혹은 비어있음의 美學(미학)‘은 한 청년시인의 시세계를 분석한 글이다. 詩(시)읽기에 있어서 批(비) 意識(의식)과잉을 자제하는 것도 힘 드는 일이지만 詩分析(시분석)의 날카로움을 견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글은 그런 점들이 어느 정도 성취된 것으로 보인다. 분석 대상에 대한 언어의 선택이나 용어사용도 크게 어긋남이 없다. 그러나 본문에서 매우 관념화된 용어, 예컨대 美學(미학)이나 詩學(시학)과 같이 意味再生産(의미재생산)의 폭인 큰 용어를 남용하고 있어서 그 보다 훨씬 축소된 언어 또는 더 정확한 용어를 골라 썼으면 하고 아쉬움을 남긴다.
  장려상 ‘詩的(시적) 대상인식의 문제’는 부제에서 밝힌 것처럼, 素月(소월)과 尙火(상화)의 님을 비교하고 그 뜻을 밝힌 글이다.
  논리를 구상하는 능력도, 문제를 파악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능력도 칭찬할만하다. 그러나 批(비)的(적) 언어와 논리가 전체적으로 아직 文學批(문학비)의 그것에 도달하기 에는 힘겨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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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유하는 1988년 문예중앙 제10회 신인문학상에 ‘무림일기’ 연작시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한, 이제 겨우 3년밖에 안된 신예시인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1989년 그의 첫 시집 ‘무림일기’를 우리 앞에 내 놓았고, 최근 주요 문예지 및 동인지를 통해 적지 않은 작품들을 발표, “90년대 문학을 상징하는 하나의 단서”로 또는, “산업사회의 정체와 그 병적 징후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시인”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유하의 시에 따라붙는 위와 같은 평가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그의 시가 보여주는 폭넓은 현실인식과, 이에 대응하는 다양한 시 쓰기의 모색에서 찾아진다. 유하시의 현실은 도시와 농촌, 그리고 꿈과 관념의 세계를 넘나드는 넓은 공간이다. 유하의 시에 그려진 도시의 모습은 파행적 정치체제의 싸움터이자, 퇴폐적 대중문화의 안식처일 뿐이다. 그 도시에서 사람들은 점점 물신화되어 가는 것이다. 물신화된 현대 물질문명은 그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했던 농촌마저 잠식해 들어온다. 그때 유하의 시는 꿈의 공간으로 흘러들어 간다. 이러한 유하시의 현실은 풍자시, 구체적 서정시, 연애시라는 다양한 시 쓰기의 방법과 겹쳐져, 읽는 이의 마음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며, 때론 꿈꾸게 하기도 한다. 하여 유하시는 슬픈 웃음의 색조로 채색되어 있다. 그럼, 이제 유하가 그려내는 슬픈 웃음의 현실로 들어가 보자. 그래서 유하시가 보여주는 90년대 문학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2. 무림, 영화 그리고 깨달음

  유하의 시선은 바로 우리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유하가 들어가서 해체하고 뒹굴며 말하려 하는 것은 아주 일상적이고 항상 가까이 존재하지만 우리들 스스로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쉽게 긍정하려 들지 않는 ‘대중문화’의 광장이다.
  유하는 그 ‘대중문화’의 울타리 안에서 무협지를 읽고, 3류 영화를 본다. 그리고 시를 쓴다. 그 시가 ‘무림일기’와 ‘영화사회학’연작시이다. 유하의 번뜩이는 재치와 날카로운 풍자가 화해롭게 겹쳐진 대중문화 풍자시는 ‘키치중독자’인 유하와 우리들을 ‘키치반성자’로 만들고 있다.

  武歷(무력) 19년 초봄, 철청단이란 자객의 무리들이 난데없이 출몰해 무고한 백성들을 자객훈련 시킨다며 잡아가둔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소림삼십육방 통과보다 더 악명 높다는 지옥십관 훈련 그러나 대부분 지옥일관도 통과하지 못하고 독가시 채찍에 맞아 원혼이 되었다. 그 무렵 하남 땅에선 민초들의 항쟁이 있었다.
  -‘武歷(무력) 18년에서 20년 사이-무림일기1’ 부분

  중원에 愛夷酒(애이주) 환자 일만명
  사실무근이므로 보도하지 말것

  사천표국 색마검귀의 채음보양술 사건은
  단순히 차력음양대법이라 쓸것

  죽엽청과 삶은 만두 먹는
  무림맹주 존영 크게 실을 것
  (말 안듣는 무협신문은 고량주 광고 잔뜩 줄것)
  -‘오늘의 전서구-무림일기5’부분

  유하는 고등학교 시절, 가방에 무협지를 10질 이상씩 넣고 다니며 읽는 한마디로 무협지 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른이 된 어느 날 유하의 눈에 비친 현실세계의 모습이 그때 읽은 무협지의 비현실적 내용과 너무 흡사함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 <하남의 대혈겁>, <지옥 십관 훈련>, <무림맹주>, <무협신문> 등의 무림언어는 현실 풍유언어로의 시적 변용을 이룬다. 유하가 쓰는 ‘무림일기’는 무협지 속에서 ‘현실바라보기’이다. 그 ‘현실바라보기’는 80년 5월광주의 상처, 아니 그의 표현에 따르면 <하남의 대혈겁>으로부터 파생된 80년대 정치, 사회, 문화의 비현실적인 모습들을 무림언어의 시적 변용을 통해 생성된 풍자의 공간속에 집어넣어 예리하게 해부해 내고 있다. 그 풍자의 공간에는 <무림제일문 무사들이 최루장풍 출수하는 소리>와 <만년한철의 지하뇌옥에서 신음하는 강호인>의 고통소리가 겹쳐져 난다. 그러나 그 겹쳐짐의 모순은 <매일 강호인들에게 미혼약을 뿌리고 섭혼술을> 쓰는 <무협방송>의 현란한 음악에 묻힐 뿐이다. 어찌 이것이 황당무계한 무협지의 세계인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현실인 것을.
  무림언어를 통한 유하의 ‘현실바라보기’가 적절한 긴장감을 가지고 읽혀지는 데는, 그의 시가 갖는 독특한 ‘말겹침’의 시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武歷(무력)은 무력으로밖에 지킬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 <중원에 愛夷酒(애이주) 환자일만명> 등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는 유하의 독특한 ‘말겹침’의 시어는 <5공과 손오공>, <만해와 일해>, <요순시절과 요망시절>등으로 이어져 그의 풍자영역을 깊고 날카롭게 넓히고 있다. 유하의 ‘말겹침’의 시어는 동음이의어, 유사이의어의 절묘한 대비, 과거와 현재, 비현실과 현실의 조합에 의한 언어적 충돌에서 생겨나, 그의 시를 읽는 독자를 즐겁게 하고, 동시에 현실의 모순을 깨닫게 한다.
  무협지를 통해 현실을 바라본 유하의 독법은, 이제 3류 저속영화의 낡은 공간속에서 영화언어로 재생되어 나타난다. 유하의 ‘영화사회학’연작시는 모순된 현실과 그 속에서의 교묘한 이데올로기 조작을 영화라는 대중문화의 화면위에서 폭로해 낸다.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하며 이미 4편의 소형영화를 찍은 영화학도 유하. 그가 즐겨 사용하는 영화기법은 몽타주(montage)일 것이다.

  몽타쥐 기법의 마술사
  에이젠슈타인이 만든
  세계영화사상 불후의 명작
  전함 포템킨
  특히 오뎃사 계단 위의 군중 학살 장면은
  몽타쥐의 진수를 보여준다
  발포하는 코자크 병사들
  계단 위에 피흘리며 뒹구는 군중들

  우리나라 영화학도들은
  그 장면을 바이블처럼 뒤적이며
  몽타쥐를 배운다
  같은 학살의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 몽타쥐의 발전을 위해

  진실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약삭빠른 다람쥐
  우리나라 몽타쥐
  -‘전함 포템킨-영화사회학’ 전문

  몽타주(montage)는 둘 이상의 따로 따로 된 화면을 창조적으로 결합시켜 현실과는 다른 새로운 장면이나 사상적 내용을 형성하는 영화기법이다. 이러한 영화기법을 유하는 자신이 본 영화를 읽어내는 하나의 독법으로 재생산 한다. 그래서 ‘전함 포템킨’을 보면서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기법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한다. 그때 그는 <우리나라 몽타쥐>가 <진실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약삭 빠른 다람쥐>와 같음을 안다. 진실이 빠져나간 몽타주, 그것이 우리 영화의 현실이자, 우리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러나 시인의 언어로 재구성된 몽타주는 진실을 보여주는 몽타주이기도 하다. <인자한 미소의 얼굴>에 <피의 아수라장>을 몽타주로 연결시켜, 지배자들의 인자한 미소 뒤에 숨어 있는 무서운 음모들을 영상에 비출 때 그것은 진실된 몽타주로 재생산 되는 것이다. 그 진실된 몽타주는 이제, 포르노와 뉴스를 몽타주로 연결시켜 <포르노엔 지배자들이 살포하는/포르말린 냄새가 배어 있음>을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심야다방 여관 만화가게마다
  절찬리에 상영중인 깊이 더 깊이 피스톤 신화
  단속반이 뜨면 헉헉대는 화면은 잽싸게
  보도본부 24시로 바뀌지
  오늘도 반복되고 있을 포르노와 뉴스
  그 충돌의 몽타아지
  -‘파리애마-영화사회학’ 부분

  뉴스와 포르노영화가 몽타주로 연결되는 이 현실. 유하는 이러한 포르노영화속에서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는 <피스톤 신화>를 읽어낸다. 피스톤은 누르면 내려오고 밀면 올라가는 단순 반복 행위만을 수행할 뿐이다. 그 <피스톤 신화>에 우리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익숙해져 간다는 무서운 세계 인식. 이 무서운 세계에서 <깊숙이 더 깊숙이> 번져오는 지배자의 <포르말린 냄새>를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가?
  유하는 말한다 함께 영화를 보자고. 그리고 그 영화공간속에 교묘히 숨어 있는 지배자의 대중문화조작을 찾아내야 한다고. 하여 나와 유하는 오늘도 고통스러운 3류 영화관을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든다.
  유하의 키치중독, 아니 우리 모두의 키치중독이 얼마나 심하고 깊은가를 유하는 그 한가운데에 서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키치중독자’ 유하의 언어들이 상투적이지 않고 새롭게 살아 다가오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거기에 유하의 냉혹한 ‘키치반성’ 즉 ‘자아성찰’과 ‘자기반성’이 자리한다.

  만약 내 시의 사부가 있다면?
  이놈, 하산은 무슨 얼어죽을…
  연필만 한 삼년 더 깍아라
  -‘돌아온 외팔이-영화사회학’ 부분

  안락한 의자 환한 조명 아래
  나의 시는 어떤가?
  오징어 회를 먹으며
  오랜만에 내가 내게 던지는
  뼈 있는 물음 한마디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부분

  일견 장난스럽게 보임에도 불구, 이만큼 자기의 시에 대해 냉혹한 반성을 가하는 시인도 아마 드물 것이다. <연필만 한 삼년 더 깎은>후에 비로소 시를 쓸 수 있다는 시인 스스로의 <뼈 있는 물음>. 유하는 자신의 시에 대해 끊임없이 사고하고 긴장하고 질책함으로써 구체적 현실과 시 속의 사실, 시와 시를 쓰는 시인, 시를 읽는 독자와 시 사이의 시적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해 내고 있다. 물론, 유하의 자기반성이 풍자의 연장 속에서 읽혀질 때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으나, 오히려 유하가 바라보는 현실의 시선을 그의 시자체로 돌릴 때 그의 자기반성은 자기 시의 흐려진 눈을 씻어내는 울음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하의 무협지 읽기와 영화 보기는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는 것일까? 그것은 시인 자신의 <깨달음>일 수도 있고 그의 시를 읽는 독자들의 <깨달음>일 수도 있을 텐데, 결국 우리 모두가 인식해야 하는 평범한 진리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 보잘 것 없는 무게에도 쩔쩔맨다고 하여 그를
  무지렁이라 비웃지 말라
  새로운 무거움의 고통을 감수하며
  하나, 하나, 바벨을 늘려가는 자만이
  결국 새로운 세계를 견딜 수 있으리니
  -‘인생 공부’ 부분

  피서지의 바닷가
  밤하늘을 보며
  세상에 그냥 얻어지는 즐거움이란
  없다는 걸 알았다
  별 하나에 어쩌구
  별 둘에 어쩌구
  그 작은 소시민적 낭만을 얻기 위해서도
  밤새 딱딱 손뼉을 치며
  억센 모기들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여야 했다
  -‘피서지에서 생긴 일’ 전문

  유하시가 전하는 그 평범한 진리는 <세상에 그냥 얻어지는 즐거움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뻔한 이야기란 없다>는 현실인식으로 이어진다. 하여 <새로운 무거움의 고통을 감수하며> 우리는 그 무거운 고통을 강요하는 현실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 왜? <새로운 세계>에서 견디기 위해.


  3. 되돌아감 그리고 비어있음.

  무림, 영화세계 속에 들어가 그것을 느끼고 체험하며 동시에 그러한 대중문화에 배여 있는 지배자의 교묘한 신화조작을 읽어내고 반성하는 유하. 유하는 그 비현실적 현실들 속에서 서둘러 걸어 나온다. 어두컴컴한 도시의 거리가 그를 맞는다. 규격화 되고 일면 정확해 보이는 도시의 건물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문명도시. 그 거리를 무의식적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유하는 그들 일상화된 도시인들을 < 날개 없는 키위새>, 또는 <지네>라고 부른다.
  무엇이 현대인의 날개를 퇴화 시키고 그 자리에 항상 기어 다니는 <지네>의 속성을 주입하고 있는가?

  이제 어디를 가나 아리바바의 참깨
  주문없이도 저절로 열리는
  자동문 세상이다
  언제나 문 앞에 서기만 하면
  어디선가 전자감응장치의 음흉한 혀끝이
  날름날름 우리의 몸을 핥는다 순간
  스스로 문이 열리고 스스로 우리들은 들어간다.
  - ‘자동문 앞에서’ 부분

  자동판매기의 검문을 통과하는
  알맞은 규격의 삶들
  쨍그렁
  전화통도 내 동전을 토해 놓는다
  자세히 보니
  귀퉁이가 조금 찌그러진 동전 한 닢
  울컥.
  내 자신이 토해진 느낌이 든다.
  -‘동전 한닢’ 부분

  그것은 물신화된 후기 산업사회의 극명한 인간소외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제 <자동판매기>, <자동문 세상>에 우리의 모습을 내밀어야만 한다. 그 <자동문 세상>의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 우리는 점점 규격화되고 획일화 되어 간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세워진 도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세워진 도시, 인간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들이 이제는 인간의 개성을 말살시키고, 인간 스스로 극심한 소외를 느끼게 되는 <자동문 세상>. 그곳에서는 인간으로의 체화가 아닌 기계로의 물화가 진행된다. 이러한 물신화되고 파편화된 현대 대중사회에서 편리하게 살기 위해 <남을 밟고 우뚝서기 위해> 사람들은 <알아서 기는><지네>가 된다.

  아아 알아서 기면
  모든게 알아서 편리한 세상
  -‘알아서 기는 법’ 부분

  그때 시인은 경고한다.
  머지 않아 우리들은 두 손을 잃고 말 것이다.
  정작, 두 손으로 힘겹게 열어야 하는
  그
  어떤
  문 앞에서는
  키위키위 울고만 있을 것이다.
  -‘자동문 앞에서’ 부분

  라고. 그리고 외친다 이 물신화된 삶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유하의 벗어남은 유년, 농촌, 고향으로의 ‘돌아감’으로 귀착된다. 그가 물신화된 삶으로부터 벗어나 되돌아간 고향에서 그는 자유로운 농촌서정과 자연스러운 고향 풍경, 그리고 토속적 한국어들과 즐겁게 만난다. 아마 신선한 풍자와 독특한 ‘말겹침’으로 우리사회의 모순을 예리하게 해부한 ‘무림 일기’, ‘영화 사회학’ 등의 시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유하의 이러한 서정성 깊은 시들과 만나게 될 때, 그의 시에 붙여진 “90년대 우리 시단의 비어 있는 부분을 채워주는 시인”이라는 평가에 긍정의 뜻을 표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서정이 관념으로 만들어진 비현실적 서정이 아닌, 농촌 현실들과 겹쳐지면서 나타나는 ‘구체적 서정’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확신이 된다.
  하여 우리는 대중문화로 온통 오염된 물신화된 세계를 벗어나, 돌아가고 있을 그의 시의 행로를 뒤 따라가며 그 ‘구체적 서정’을 함께 체험해보려 한다. 그리로 가는 길목 어귀에는 <늘> <할머니>가 서 계신다.

  그래도 그 자리 늘
  부석작 대포리 튀는 소리 들린다.
  부뚜막 오가리 끓는 소리 들린다.
  살강 보시기 부딪는 소리 들린다.
  마침내, 실날같은 숨결로 피어올라
  식은밥 같은 하나대 감싸는
  냉갈 하나
  할머니
  -할머니 부분

  고향과 농촌을 대변하는 상징적 시어인 <할머니> 는 유하 시에 있어 중요한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먼저 우리를 물신화된 현실에서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매개로서의 <할머니>이다. 그 <할머니>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 <할머니>이다. 하여 <할머니>와의 만남은 시인에게 또는 우리에게 구체적 농촌서정으로 돌아왔음을 느끼게 한다. 그 농촌에는 <백년 묵은 감나무에 닳고 닳도록 감이 열리>고, <노랑나비 떼 무시로 넘나들던 넘서발>이 있다. <할머니>는 <늘 넘서발 잠들지 않게 일깨>워 <돔부 토란 가지가지가지 넘쳐>나게 한다. 이때 우리의 <할머니>는 풍요롭고 행복하다.
  두 번째, <할머니>의 의미는 옛날 한국적 토속어들을 오늘의 현실에 되살려 내고 있다는데서 찾아진다. <부석작>, <오가리>, <살강>, <돔부>, <냉갈>, <망구> 등의 시어가 <할머니>의 입을 통해 들릴 때, 물신화된 현대사회의 오염된 언어에 익숙해진 우리들의 입과 귀는 깨끗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유하시의 ‘구체적 서정’은 농촌의 풍요로움과 자연스러운 고향의 추억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그의 ‘구체적 서정’은 풍요로운 농촌풍경의 아름다운 추억을 그리워하는 만큼, 그것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아니 몰락해 가고 있다는 고통스러운 현실인식이 함께 하여 비로소 ‘구체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인식하에 그의 시의 나머지 부분을 읽으면

  고향을 떠나 온 뒤로 줄곧 내 시의 낭만적 소재가 되곤 했던
  그 쑥국새가
  끝없이 산천을 뒤흔들고 지나가는
  쌕쌕이들의 간담 서늘한 포효 속에서
  살아 남으려고
  진땀 흘리며 울고 있는
  -‘지금, 쑥국새는’ 부분

  것을 알게 된다. 그 <쑥국새>의 울음은 물신화된 현대문명의 이기에 밀려난 소외된 인간의 울음이자, 몰락해 가는 농촌의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시인의 고통스러운 현실인식은

  이제 할머니의 호미 늙고 지쳤네
  무성한 잡초 주인 잃은 호박덩굴에 파묻혀 그 넘서발
  마침내 영원히 잠들려 하네 잠들려 하네
  ‘할머니와 넘서발’ 부분

  라는 안타까운 현실인식으로 이어져 우리들의 추억 속에 담겨 있는 그 옛날 풍요로운 <할머니>의 존재를 망각하게 한다.
  물신화된 도시로부터 고향으로의 즐거운 돌아감을 기대했던 유하는 어제 현실로부터 솟아  올라 관념의 공간에서 꿈꿀 수밖에 없다. 유하의 연시는 꿈꾸면서 쓰는 아름다운 사랑노래이다.

  내 몸 그대에게 물처럼 흐르는 꿈을 굽니다.
  나 그대 앞에서 물처럼 투명한 꿈을 꿉니다.
  물처럼 투명한 내 몸 속, 물처럼 샘솟는 내 사랑 보입니다.
  -‘나는 물의 마음을 꿈꾼다’ 부분

  갑자기 시의 대상이 물신화된 현실과 고향, 농촌의 서정, 몰락으로부터 ‘그대’라는 조금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관념어로 바뀌어진다. 그것은 그의 시가 구체적 현실로부터 멀어져, 관념적 꿈꾸기의 세계로 몰입했기 때문이다. 시인의 꿈꾸기는 곧 시인의 말하기이다. 그래서 유하는 꿈꾸며 말한다. 그 첫마디가 <물처럼 투명한 내 몸 속>에서만 <물처럼 샘솟는 내 사랑>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처럼 투명>하게 비어 있어야만, 비로소 내 사랑을 볼 수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유하시의 또 하나의 드러냄의 방법과 미학을 엿볼 수 있다. ‘비어있음’의 미학이 바로 그것이다.

  그대 떠나보내야 내 사랑 자란다는걸 알았습니다.
  은행잎 하나에도
  그대 얼굴 물드는 시간입니다.
  은행 나무처럼 나 이제 그대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눈부신 명상입니다’ 부분

  <그대>를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어하는 유하의 연시는 동양적 ‘무소유’의 세계에 연결되어 있다. 그 ‘무소유’의 시는 시인에게 <꽉찬 그리움으로 /그대를 담으려>한 자신을 반성하게 하고, <텅텅 빈 갯벌위>를 <한 마리 작은 게처럼 고요히 걸어>가게 만든다. <텅텅 빈 갯벌위>를 걸으면서 시인은 진정한 <그리움의 첫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다. 시인의 <걸음마>는 <그대 떠나보내야 내 사랑 자란다는걸 알>게 되고, <그대를 소유하지 않>음으로써만 <그대>를 진정으로 안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될 때 완전한 ‘걸음’이 된다.
  그렇다면 유하의 연시가 주된 그리움의 대상으로 삼는 <그대>라는 대명사는 어떻게 ‘비어있음’의 미학 속에서 솟아오르는가? <그대>를 꿈꾸며 시인은 두 가지를 말하려 한다. 하나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진정한 만남의 갈구이며, 둘은 인간과 세계사이의 새로운 관계설정의 모색이다. 예를 들면,

  내 사랑 얼마나 더 무심해져야
  늦가을 밤처럼 깊고 깊은 그대 가슴,
  찌르르 귀뚜라미 울겠습니까.
  -‘찌르르 울었습니다’ 부분

  와 같은 시가 인간과 인간사이의 진정한 만남을 희망하고 있다면

  오늘도 새 울음 하나 없는 세상을
  기우뚱 거리며 걷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사는 침침한 토굴 속으로
  박쥐처럼 찾아들 것입니다.
  -‘우유를 엎지르는 여인’ 부분

  와 같은 시는 <새 울음 하나 없는 세상>과 <기우뚱거리며 걷>는 <나>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기 위해서 유하는 비어있어야 한다고. 소유하려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유하의 ‘비어있음’의 미학은, 하여 구체적 사실 속에서 시 쓰기를 넘어, 진실로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시인의 보편적 세계관의 구현이라고 보여진다.


  4. 맺음말

  이제까지 우리는 유하시의 경쾌한 발놀림을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힘겹게 뒤따르며 그의 다양한 시 쓰기를 체험하였다. 우리는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기간이 그리 길지 않음에도 불구, 현실 풍자시, 농촌의 토속적 서정이 짙게 배인 구체적 서정시, 그리고 <그대>를 그리워하는 연시까지 다양한 시 쓰기를 모색하고 있다는데 주목한다. 더욱이 이러한 다양한 시 쓰기가 나름대로 현실과 탄탄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쓰여진다고 할 때, 그가 분명 90년대 우리 시단의 비어있는 부분을 풍요롭게 하리라는 믿음에, 의문의 꼬리표를 떼어 버려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이제까지의 유하 시 살펴보기를 정리하게 나를 이끈다.
  먼저 유하의 현실 풍자시는 문화현실주의에 둔감해 있는 우리 모두에게 대중문화의 대중조작을 일깨워내며, 동시에 지배자의 이데올로기 조작을 폭로해내, 우리들을 <깨달음>의 그곳으로 인도한다. 그 과정에서 유하 특유의 ‘말겹침’의 시어는 매우 훌륭한 풍자를 가능케 하지만.

  김현 선생이 놀이에 치우쳤다는 내 시를 고민하
  - ‘세상아 놀자‘ 부분

게 하기도 한다. 그 고민은 그의 풍자시가 아주 재미있게 읽는 이의 현실인식을 가능케 하지만, 그러한 풍자가 현실과의 긴장관계를 상실해 지나친 말놀이로 상투화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나온다.
  다음으로 몰락해 가는 농촌의 현실을 매우 정감어린 토속적 한국어로 그려낸 구체적 서정시는 유하 시 중 가장 뛰어난 성과를 얻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구체적 서정시는 잊혀져가는 토속적 한국어를 되살려 낸 뒤, 그 위에 농촌의 몰락이라는 구체적 현실을 겹쳐 드러내, 아름다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 위 연시는 현실로부터 한 발자국 벗어나 관념적 언어들로 현실의 고통을 모두 감싸 안아, 전체로 나아가는 궁극적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다고 보여지지만, 기존의 그의 시들에 비해 현실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연시를 우리들의 삶과 터전에 대한 끝없 사랑이라는 유하 시 전체의 맥락으로 엮어 분석할 때,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의 화해로운 만남이라는 긍정적 세계관을 그의 시는 분명 보여주기도 한다하여 그의 ‘비어있음’의 미학이 갇혀 있는 관념의 공간으로부터 벗어나 도시의 삭막한 빌딩, 농촌의 넘서발, 3류 영화관 등의 구체적 현실 공간들 속으로 스며들 때, 현실적 아름다움으로 텅 비어있는 그의 시와 만나게 될 것이다.
  유하의 다양한 시 쓰기는 경직된 우리사단의 활력소이다. 또한 그것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시인의 한없는 사랑노래의 각기 다른 시적 표현이다. 시인의 한없는 사랑이 그의 시를 다시 읽게 한다. 그러면 그의 시에는 거의 마침표가 찍혀 있지 않음을 안다. 왜 시인은 그의 시들에 마침표를 찍지 않았을까? 그의 시가 모두에게로 열려 있고, 모두에게로 나아가려 한다는 시인의 의지가 아닐까? 마침표 없는 그 발놀림을 따르기에 너무 느린 발걸음을 가졌음을 절감한다. 그러니 어찌하랴.

  내 백골 진토된 뒤에도
  저 깜깜한 밤하늘 활활 태우기 위해
  우르릉 우르릉 우뢰소리로 달려 오는
  - ‘별’ 부분

  그의 또 다른 시들을 <묵묵히>기다리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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