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둠의 기록

▲ 당선소감
신은정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순수한 절망도 아니고 열렬한 열정도 아닌 무덤덤함. 이것이 바로 활기니 패기니 하는 기운 넘치는 단어들과는 거리가 먼 나의 맥없는 젊음인가 봅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지금 이 순간 순간들, 나는 얼마나 무기력하게 잠자고 있는지요.
  깊어가는 계절이라… 이 가을에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진절머리나는 나태의 늪 속에서 나를 흔들어 깨우고, 내 의식을 항상 부딪히게 하고, 그 아픔을 느낄 수 있도록 눈 뜨는 작업, 아마 이것이 내가 짊어져야 할 힘겨운 숙제겠지요. 올 가을엔 진정으로 미칠 수 있는 나만의 일거리를 찾아 행복한 땀과 눈물에 흠뻑 젖어보려고 합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것이 내가 느끼는 심한 부끄러움에 대한 작은 위로가 될는지도.
  착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게 들려준 그들의 소중한 이야기도 결코 잊지 않겠노라 약속합니다.
  소설은 낮게 기어가며 저인망어선처럼 바닥을 긁어가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바닥과 우리들 인생의 이 가이없음을…


▲ 심사평
김문수<동문․소설가>
이원규<동문․소설가>

  전체 응모작의 수준은 예년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결선에 오른 것은 ‘야간작업’ ‘소문의 늪’ ‘우리들의 강’ ‘그 어둠의 기록’ 4편이었다. ‘야간작업’은 제대한 뒤 복학이 좌절된 청년이 공장에 취직, 동료공원들과 관계가 형성되지 못한 채 고독과 자기 침잠 속에 기계의 노예가 된 상태로서 상황과 대결하는 내용으로 끌고 나가는 힘이 좋고 현장감도 생생했으나 구도가 약한 게 흠이었다. ‘소문의 늪’은 단편으로는 드물게 전지적 시점을 쓴 것이 인상적이었다. 긴장감이 드러나고 강박관념의 심리표현이 돋보였으나 비문(非文)이 더러 보이고 사변이 많은 게 아쉬웠다.
  ‘우리들의 강’은 1인칭 여로형의 전형으로서 현실과 회상을 적절히 교차시키고 문장이 세련된 작품이었다. 운동권 출신의 이야기이면서 이 시대에 대한 아픔이 묻어나지 않는 것, 분규가 배치되지 않은 것이 아쉬웠으나 감각적인 문장이 주는 기능성이 주목되어 장려상으로 밀었다.
  ‘그 어둠의 기록’은 중년여인의 내부의식 세계를 파헤친 사소설 형식으로 불행과 시련 속에서 여인으로서 갖게 되는 애증과 자의식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었다. 전반부에 두어 개 복선과 소분규가 배치되지 않아 지루한 것이 불만이었으나 전체적으로 필연의 경위(經緯)로 짜여진 설정, 참신하고도 감각적인 문장, 그리고 전처소생의 딸을 살해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애정을 회복하는 결말 처리, 이 시대의 아픔을 드러낸 점, 그런 것들이 호감이 가고 장차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치열한 작가혼이 드러나 다른 작품들보다 앞세워 본상으로 정했다. 정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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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겨워.
  어느 새 주위는 밝아져 있다. 이중으로 된 창문에다 커튼까지 꼼꼼히 드리워져 있지만 그까짓 거 뭐 대수냐는 듯 햇빛은 온 방안을 휘휘 저으며 부유하고 있다.
  한쪽 팔을 들어 얼굴 위에 올려놓는다. 하지만 막을 길이 없다. 이 빛은, 밝음의 정체를 거부하는 손길에 힘을 가하면 가할수록 빛은 점점 더 나를 옥죄어온다.
  살금살금 눈언저리를 서성거리던 빛은 내 몸의 세포들을 서서히 달구기 시작한다. 미세한 온기는 미친 듯이 꿈틀거린다. 감겨진 눈꺼풀은 마치 흰색의 그림종이처럼 펼쳐지고, 갖가지 물감을 짜내듯 노랑 빨강 보라 주홍 파랑 등의 색깔이 그 위에서 꼬리를 물고 날뛴다. 광란의 빛……색색이 어우러져 불똥이 튄다. 활활 타오른다. 살려줘.
  이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빛의 기운은 날카로운 화살촉이 되어 안구 깊숙이 날아와 박힌다. 눈이 아린다. 의미 없는 눈물이 핑그르르 돌다가 이내 귀 밑으로 흘러내린다.
  지겨워.
  나는 다시 한 번 중얼거린다. 착실히 훈련받은 구관조처럼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지겨워를 정말 지겹도록 내뱉는다.
  고인 물기로 인해 시야가 흐리다. 나의 시선은 천정을 향해 꽂혀있다. 엷은 회색바탕의 벽지 위엔 여러 가지 꽃묶음들이 한데 얼크러져 있다. 하나, 두울, 세엣……일곱, 여덟, 아홉. 채 열을 헤아리기도 전에 눈물은 또 한바탕 쏟아질 기세다. 가지런히 묶여있던 꽃다발은 낱낱의 송이 송이로, 이윽고 꽃잎 한 장 한 장으로까지 파편처럼 흩어지고 만다. 혼돈, 어지럽다.
  내 머리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베개는 매일 아침 무슨 정화작용처럼 떨궈내는 나의 눈물방울을 이렇듯 고스란히 삼키고 있다. 거머리의 빨판보다도 더 강하게 내 몸의 물기를 빨아들인다. 베개에선 찝질한 소금 냄새가 난다. 갑자기 예리한 송곳으로 베개의 심장부를 겨누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래서, 새어나가지 않게 꼭꼭 가두어둔 나의 짓무른 외로움과 한숨을 일시에 터뜨려버릴 수 있다면.
  머리맡의 탁상시계가 10시를 가리키고 있다. 턱 밑까지 이불을 바싹 끌어올리고 나는 조금 더 뭉그적거린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내게 주어진 또 하루치의 삶의 무게를 어떻게 견뎌내야 하는 것일까. 전신을 감싸는 이 막막함. 대책 없는 무기력증 앞에서 나는 한없이 초라하고 왜소해진다.
  지겨워.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다본다. 헝크러진 침대 위의 시트와 이불은 마치 뱀이 허물을 벗어놓은 것 같다. 화장대 앞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거울을 통해 구겨진 침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주름 잡힌 시트 자락을 깨끗이 다림질하고픈 충동이 인다. 다리미를 어디에 두었더라 곰곰이 생각하지만 머릿속 기억장치는 삐걱거리기만 한다. 장롱 안, 침대 밑, 아니면 거실 소파 뒤쪽, 부엌 선반 위, 아니 어쩜 건넛방 희원의 책상 아래에 있는지도 몰라. 머릿속은 고철 나부랭이들이 마구 뒤엉킨 것 같아서 단순한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는 데에도 무척 곤혹스럽다.
  결국은 처음부터 다리미가 우리 집에 있었던가 없었던가에까지 다다르자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민다. 기다렸다는 듯 가벼운 미열과 함께 쿡쿡 바늘로 쑤시는 것 같은 두통이 찾아온다. 이깟 하찮은 일로 신경을 쓰다니.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이미 나의 사고는 고리와 고리가 잘 연결된 질서정연함과는 거리가 멀어져 있다.
  눈 주위가 거무스레한 늙은 여자가 매섭게 쏘아보고 있다. 움푹 들어간 눈은 살점이 뜯겨나간 해골을 연상시켜 섬뜩함을 느낀다. 몹시 지쳐 보이는군요. 피곤으로 찌든 푸석푸석한 얼굴을 안쓰럽게 여기며 늙은 여자의 얼굴로 손을 가져간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타원형의 거울 속에는 양미간을 찌푸린 늙은 여자가 낯설게 앉아있다.
  엷은 먼지가 쌓인 화장품 하나를 거칠게 집어 든다. 손가락으로 크림을 덜어 얼굴을 맛사지 한다. 잠시 번들번들한 윤기가 흐른다. 화장솜으로 얼굴에 묻은 크림을 닦아내자 조금 전에 보았던 늙은 여자가 묘하게 인상을 일그러뜨린 채 웃고 있다.
  밥을 해야겠어. 나는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쥔다. 불규칙적이다 못해 아예 식사를 하는 때보다도 거르는 날이 많아서인지 가끔씩 위가 쓰려온다. 입 안에선 기분 나쁜 쓴 물이 치밀어 오른다.
  방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다. 나는 서둘지 않고 손잡이를 돌린다.
  퀴퀴한 냄새. 거실은 짙은 갈색의 장식장들과 검은 가죽소파가 자아내는 음울한 분위기 탓에 한결 더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지난 넉 달 동안 집 안의 모든 창문과 커튼은 성난 아이처럼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열릴 줄을 모른다. 비질 걸레질은 손에서 떠난 지 한참 되어서 희미하게나마 햇빛이 스며들 때면 온갖 먼지들이 헤엄치듯 공기속을 둥둥 떠다닌다.
  소파에 걸터앉아 손으로 탁자 위를 훔친다. 손은 금세 시커멓게 변한다. 집안은 온통 더러운 먼지와 때로 가득 차 있어서 깨끗이 치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는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머지않아 뿌연 먼지 입자들의 부피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집 전체를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바꾸어 놓고 말 것이다. 나는 전의를 상실한 군인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으음……음……으으.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새어나온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각형의 공간에서 내 귀는 예민하게 움직인다. 분명 희원의 방에서 흘러나온 소리다. 애써 태연한 척 가장하지만 소용이 없다. 신음소리는 점점 더 크고 또렷하게 귀청을 울린다. 거의 무의식적이다시피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는다. 낮게 울부짖는듯한 신음소리는 가슴 한 복판을 면도칼로 도려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구멍이 뚫린 가슴 속으로 휑하니 찬바람이 불어 닥친다. 나는 오른 손으로 쥐어뜯을 것처럼 가슴을 억세게 움켜잡는다.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한다. 헉헉 더 이상 주체할 수가 없다. 고막이 터질 것 같다. 그리고 심장이……
  제발 그만해.
  이윽고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만다. 뼈와 살이 녹아 흐르는 것 같은 식은땀 때문에 온 몸은 축축이 젖어있다. 주정뱅이처럼 휘청거리면서 나는 부엌으로 간다. 냉장고 문을 열어 물주전자를 감싸 쥔 채 나는 잠시 그대로 쭈그리고 앉는다. 밤새 갇혀있던 서늘한 공기가 땀구멍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몸뚱아리를 서서히 식혀준다. 오싹 한기가 끼친다. 냉장도 문을 닫고서 나는 걸신스레 물을 마신다. 주전자 주둥이를 입 안 깊숙이 밀어 넣고서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 킨 물은 금새 바닥을 드러낸다. 급히 마신 탓인지 골속까지 찌릿찌릿해지면서 나는 선 채로 꽁꽁 얼어버릴 것만 같다.
  잦아든 신음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개수대 앞으로 다가선다. 음식찌꺼기가 말라붙은 남비와 그릇 등으로 설거지통은 이미 포화상태가. 나는 수도꼭지를 세게 튼다. 집 안 구석구석에 만성적으로 배어있는 적요한 분위기를 몰아내려는 듯이 유난히 달그락달그락 그릇을 부딪히며 설거지를 한다. 나는 발작적으로 그릇끼리 마찰하며 일으키는 굉음을 즐기고 싶어진다.
  부글부글 부풀어 오른 비누 거품속에서 집어든 접시 하나가 미꾸라지처럼 손 안을 빠져나간다. 쨍그랑, 바닥에 흩어진 유리조각을 주우면서 불투명하고 아리송했던 희원과 나의 관계가 명확한 단절음을 내려 마침내 종지부를 찍은 것 같은 후련함을 느낀다. 도무지 이가 맞는 구석이라곤 손톱만치도 없었던 희원과 나. 애초부터 우린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악연을 가지고 만났는지 모른다.
  아버지와 결혼한다고 해서 나까지 아줌마의 딸이 된다고 생각진 마세요. 돌아가셨지만 내 어머니는 오로지 그 분, 단 한사람뿐이에요. 8년 전, 서른 살의 노처녀 그림쟁이였던 내게 풋내기 여중생이었던 희원은 그렇듯 당돌하게 첫인사를 건넸다. 계모, 새엄마라는 낱말이 지닌 거부감쯤은 거뜬하게 극복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나를 향해 희원은 가소롭다는 듯 팔짱을 낀 채 조소를 보내고 있었다. 희원에게 한 발짝 다가가려고 하면 그 아인 냉큼 두서너 발짝 뒤로 물러서곤 하는 것이었다. 비록 한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긴 했지만 희원은 어머니로서의 내 역할을 깨끗이 거절했다. 자신의 방은 마치 신성불가침이라도 되는 양 내가 문 두드리는 것조차 질색을 해서 방청소와 빨래도 희원 스스로가 했었다. 나름대로 희원과 친해지고자 노력했던 나의 인내심은 어느 덧 한계를 드러냈고, 결국은 계모와 의붓자식간의 뜨악한 관계를 일찌감치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큰 분란 없이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비껴가는 것이 희원에 대한 나의 최선책일 뿐이었다. 희원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희원이 나에 대해 품고 있던 감정은 내 짐작보다도 훨씬 심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싫어하고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를 향해 맹렬히 끓어오르는 적의를 가슴 깊이 묻어 두진 않았을는지. 매일 밤마다 벽을 사이에 두고 증오와 저주가 담긴 주문을 읊조리진 않았을는지. 알 수 없다. 알 수가 없다.
  전기밥솥의 플러그를 꽂고 스위치를 누른다. 냉장고를 샅샅이 뒤져 반찬거리를 찾지만 변변한 음식 재료가 눈에 띄지 않는다. 시장에 다녀온 지 일주일이 넘었다. 오늘은 슈퍼마켓에라도 다녀와야 할 텐데. 바깥출입할 생각을 하면 나도 모르게 목이 움츠러든다. 문밖을 나서는 순간 신체를 덮쳐오는 환한 기운, 그 밝음 속에 교묘히 가려진 탐색하는 듯한 눈초리가 두렵기만 하다. 만약 내가 거리를 걷고 있다면 굳이 뒤돌아보지 않고서도 느낄 수 있다. 평소엔 철저한 무관심과 이기심으로 일관해오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탐조등처럼 광채를 띠고서 감추어진 나의 치부를 낱낱이 훑고 있다는 것을.
  초라한 밥상을 들고 희원의 방문 앞에 멈춰 선다.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나의 신경중추를 야금야금 갉아먹던 신음소리는 이미 그쳐있다. 나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신다. 문을 열자마자 누리치근한 냄새와 땀내가 뒤섞여 훅하고 코를 찌른다. 미처 밥상을 내려놓기도 전에 비위가 상하여 속이 메슥메슥하다.
  이마엔 굵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고 금방 샴푸한 것처럼 머리카락은 축축이 젖어있건만, 희원은 뇌수당한 동물처럼 꼼짝 않고 누워있다. 보다 못한 내가 이불을 걷어내고 희원의 등을 일으킨다. 희원은 두 다리를 쭉 펴고 앉은 그대로 움직일 줄을 모른다. 나는 희원의 코앞까지 밥상을 끌어다놓고 한 손에 숟가락을 꼬옥 쥐어준다. 그제서야 희원은 기계의 딱딱한 반복 동작처럼 숟가락을 놀려대기 시작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희원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건 오로지 밥알뿐이다. 누군가 곁에서 챙겨주지 않는 이상 희원은 밥 이외의 것에는 수저를 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희원이 밥을 유달리 좋아한다든가 반찬을 싫어한다든가 하는 식의 기호 탓은 아니다. 그저 자기 바로 앞에 놓여있는 그릇 하나를 선택해서 그 속에 담긴 음식물을 우격으로 씹고 삼킬 뿐이다. 아마 희원은 자신이 우물거리고 있는 것이 밥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을 것이다. 배가 고파도 보채지 않고 배가 불러도 사양할 줄 모르는 희원은,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취급하든지간에 아무 불평 없이 받아들이곤 한다.
  식사를 끝낸 희원의 입가에는 밥풀 몇 개가 위태롭게 붙어있다. 화장지로 희원의 입 주위를 닦아낸다. 몽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희원은 멍하니 허공 속에 시점을 붙박아두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거의 매일 희원은 꿈속을 헤어매고 있다. 비록 영화 구경하는 것처럼 희원의 꿈속을 넘볼 순 없지만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꿈은 다분히 낭만적이거나 환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몹시도 사납고 무서운 꿈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희원은 꿈을 꿀 적마다 무엇엔가 억눌린 듯한 괴로운 신음을 토해내곤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뜨고 있을 때에도 그 꿈의 여운은 얼마나 고약스러운지 희원은 하염없이 넋을 놓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 어쩌면 이와 같은 희원의 증상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댓가를 톡톡히 치르는 한 가지 방도에 불과할는지 모른다. 희원으로 인해 비교적 안정되고 평화스러웠던 집안이 하루  아침에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으니까. 그 아이 때문에 남편과 나는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희원은 벽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앉아있다. 나는 밥상을 들고 방에서 나온다. 힐끗 뒤돌아보지만 희원의 자세는 청동의 조각상처럼 단단하게 굳어있다. 살그머니 문을 닫고 부엌으로 향한다. 허기증 때문에 사지가 제멋대로 흐느적거린다. 도통 입맛이 당기질 않는 데도 밥을 물에 말아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는다. 억지스러운 숟가락질에 속력이 붙을수록 충분히 씹히지 않은 밥알들이 뱃속을 가득 채운다. 입안이 껄끄럽다.
  찰칵 손잡이가 돌아간다. 내 눈길은 얼른 소리의 향방을 찾아 머문다. 열린 문틈으로 납작하게 엎드린 희원이가 엉금엉금 기어 나온다. 희원의 몸놀림은 둔해 보이지만 정작 본인 자신은 몹시 힘겨운 듯 가쁜 숨을 몰아쉰다. 희원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짜증 섞인 답답함을 느낀다. 불쑥 욕지기가 난다. 나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재빨리 화장실로 달려간다. 하얀 양변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토악질을 한다. 창자까지 뒤틀리는 것 같다.
  더 이상 게워낼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건구역질을 한동안 계속된다. 아찔한 현기증. 나는 비칠거리면서 세면대로 다가간다. 입 안을 깨끗이 헹구고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다.
  으으음…….
  어느 새 희원은 욕실의 문지방을 넘어서고 있다. 타일로 된 한쪽 벽면을 의지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 희원은 걸음새가 매우 불안정하다. 폐쇄된 공간으로부터의 탈출, 좀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희원이 자신의 방에서 나오는 일은 극히 드물다. 겨우 하루에 두어번 남짓. 생리작용 중의 하나인 배설을 위한 목적 빼놓고는 정물처럼 움직임이 없다.
  벨소리. 난데없는 초인종 소리가 온 집안을 뒤흔든다. 엉거추춤 변기 위에 걸터앉는 희원을 뒤로 하고 나는 재빨리 현관으로 나간다. 누굴까. 아직도 우리를 찾아올 사람이 남아있단 말인가. 우뚝 두터운 철문 앞에 멈춰 선다. 퍼뜩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 있다. 주의할 것. 경계할 것. 모든 사람을 맞이할 때에는 반드시 신중할 것. 거듭 조심할 것.
  나야, 강성욱.
  짧고 명확한 음성. 휴우 안도의 숨을 내쉬고 문을 연다. 성큼 거실로 올라서며 성욱은 손에 들린 과일 바구니를 어색하게 건넨다.
  잠깐만.
  나는 안방으로 들어간다. 화장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점심때가 다되도록 헝크러진 매무새를 하고 있는 나를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새빨간 립스틱이 눈에 들어온다.
  권태로움을 위장하는 데는 그럴싸한 방법이다. 거의 매일 잠을 설친 까닭인지 얼굴은 퉁퉁 부어있고, 이 한심한 꼬락서리 하고는. 대충 머리를 쓸어 올려 고무밴드로 묶는다. 이젠 거실로 나가야 한다.
  성욱은 소파에 앉아 쿠션 가장자리에 장식된 레이스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진작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나를 눈치 채지 못했는지, 그는 여전히 손장난을 되풀이하고 있다. 갑자기 그가 움찔한다. 그제서야 나를 발견한 모양이다.
  생각해봤니?
  성욱은 대뜸 질문부터 한다. 대답이 궁색한 나는 부엌으로 가서 커피물을 올려놓는다.
  이 파란 불꽃 좀 봐. 비록 순간적이라 할지라도 찻물 끓이는 시간만큼은 언제나 행복해. 들썩거리는 주전자 뚜껑의 작은 요동. 자글자글 물이 끓는 소리. 하얗게 뿜어 나오는 수증기. 이런 것들을 대할 때면 비로소 난 살아있는 것을 느껴.
  성욱은 내 곁으로 다가와 화가 난 듯이 가스렌지의 스위치를 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젠 너도 네 생활을 찾아야 하잖아.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미국의 요양원으로 보내. 회복될 가능성도 희박한 아이를 붙잡고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제발 부탁이야.
  성욱은 두 팔로 내 어깨를 감싼다. 그동안 주변의 상황들로부터 혹독히 시달려온 나를 위로받고픈 마음 때문인지 나는 그를 뿌리치지 못한다.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리다가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만다. 어느 틈에 욕실에서 나왔는지, 희원은 거실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나와 성욱을 물끄러미 바다보고 있다. 나는 몹쓸 짓 하다 들킨 아이처럼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서둘러 성욱을 배웅하고 왔을 때 희원은 이미 거실에서 자취를 감추고 없다. 난 속지 않아. 나를 겨낭한 이 기막힌 연극. 제대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척하지만 난 알고 있어. 빈틈없이 날 관찰하고 감시하고 있는 너의 가증스런 속셈. 나는 희원의 방문을 노려본다.
  주위는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내 오랜 친구인 성욱이가 가져온 과일바구니가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남편과의 결혼을 발표했을 때 성욱은 아연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교우관계로 친밀한 사이였던 우리가 결혼까지 다다를 수 없었던 건, 서로에게 너무 편안하고 익숙하게 길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상대방을 생각할 때 오히려 거북살스러웠던 것은, 성욱과 내가 부부라는 관계맺음을 거부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여러 가직 과일 속에서 나는 사과를 집어든다. 반들반들 윤이 난 사과에는 내 얼굴이 어른거려서 흡사 거울을 보는 것 같다. 사과……바로 그 날도 이처럼 탐스럽게 익은 빨간 사과였다.
  연일 밤샘으로 그림을 완성시키고 그 날은 하루 종일 홀가분한 기분으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남편과 희원을 위한 저녁식사 준비를 일찌감치 끝내고 소파 깊숙이 등을 묻었다. 한가롭게 TV를 보며 빛깔 좋은 사과 한 알을 깨물다가, 난 그만 앞니가 떨어져나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사각의 화면 안에 단정하게 자리 잡은 아나운서가 퇴장하자 뒤이어 학생 시위 보도가 흘러나왔다. 미제국주의 타도, 애국 노동 시민 만세. 소리 높여 외치는 현란한 구호들. 머리에 띠를 두르고 현수막을 앞세운 일단의 학생들 중에 분명 희원은 거기 있었다. 평소에 말수가 적고 입이 무거운 아이가 어떻게 그처럼 당당할 수 있는지 믿기 어려웠다. 학생들이 외치는 구호들과 그들이 던지는 화염병, 돌멩이들은 내 가슴 속에 날아와 대못처럼 아프게 박혔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희원은 나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다.
  그날 밤 희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예요 라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나는 두서없이 질문을 던졌다. 괜찮니? 아직 무사한 거야? 지금 있는 곳은 어디야? 집엔 들어올 수가 없니? 벌써 알고 계셨군요. 희원은 난처하게 말했다. 돈이 좀 필요해요. 당분간 집에는 들어갈 수 없을 거예요. 나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집을 나섰다. 희원이 부탁한 돈과 입을 옷가지를 간단히 싸들고 택시와 지하철을 번갈아 탔다. 약속장소까지 가는 동안 혹시 미행이라도 당하지 않나 염려해서였다. 언젠가는 알게 될 테지만 그때까지는 아버지께 비밀로 해주세요. 몹시 놀라실 거예요. 돈과 옷가지를 전해주고 돌아서는 내 뒷모습을 향해 희원은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가택수색영장입니다. 희원을 만난 지 이틀 만에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뜻밖의 충격으로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나는 죄책감 때문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희원은 붙잡히고 말았다. 남편과 나는 경찰서에서 희원을 대면하게 되었다. 난 니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희원아. 난 너의 아버지로서 알고 싶다. 네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내가 뭘 도와줘야 하는지. 남편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희원은 냉정하게 말했다. 너무 늦었어요. 아버지는 이미 예전에 내가 존경했던 그 아버지가 아니예요.
  댁의 따님은 아주 위험한 인물입니다.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닌 사회 혁명적 성격을 띤 과격단체에 속해있단 말입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남편을 앞에 두고 교활한 눈빛의 가죽 잠바가 책상까지 탕탕 두드리며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희원처럼 악질적인 운동가들은 혼쭐을 내줘야 한다면서 단단히 벼르고 있던 가죽 잠바가 어느 날 갑자기 백팔십도 태도를 바꾼 건 의아한 일이었다. 혹시 섭섭하게 대하진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만약 불쾌한 일이 있었다면, 본의가 아니었으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가죽 잠바는 짐짓 너털웃음까지 지어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희원은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희원에게 뭔가 심상찮은 사건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원래 과묵한 아이라 그러려니 넘겼는데 희원의 눈빛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일체 입 밖으로 소리 내는 법도 없고 쫓기는 사람처럼 눈동자만 불안하게 흔들렸다. 잠자리에 들어서는 숙면을 취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가위 눌리기 일쑤였다.
  이윽고 병원을 찾았을 때, 희원의 증상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뭔가 정신적인 타격이 굉장히 컸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희원의 병세는 호전될 기미가 나타나지 않았다. 끈기를 가지고 지켜보자는 의사의 위로 섞인 말에 남편과 나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우리의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희원의 침묵은 계속되었다. 아예 말을 잃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치료에 도움이 될지 확실친 않지만 일종의 최면요법을 썼으면 합니다.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에서 환자의 생각을 끌어내려는 것인데 함께 지켜보았으면 합니다. 의사의 지시대로 희원은 눈을 감고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유리벽을 통해 남편과 나는 초조하게 희원을 바라보았다. 희원은 좀체 입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는 실망하지 않고 끈질기게 시도했다. 점점 희원의 콧등에 땀방울이 맺히고 숨이 거칠어졌다. 비록 어눌한 입놀림이었지만 희원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아 아버진 늘 자 자기 세계에만 골몰하고 있는 작가여서, 어 어머닌 아버지의 모 몫까지 가정을 채 책임져야 했습니다. 벼 병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재혼 재혼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고 곧 어머니를 잊었지만 나 난 어머니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가난 가 가난했던 어머니의 고생스러움과 고 고통을, 나만은 가 감싸주고 이해해야 한다고 새 생각했습니다. 도 돌아가신 어머니와는 비교도 안되게 새 새엄 새엄마는 아름답고 똑똑하고 부 부유한 여자였습니다. 새엄만 내 내가 싸워서 이겨야 할 저 적이었지만 내 내게로 다가오는 새엄마의 무 물결은 너무 거대해서, 하 하마터면 죽은 어머니의 조 존재를 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 그럴수록 난 가슴 기 깊은 곳에 미움 미움을 키우고 또 키웠 키웠습니다. 오 오로지 어머니처럼 고난스러운 사 삶을 사 살아가는 사람만이 내가 아 아끼고 사랑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만 내가 소 속해있는 세계에도 무 문제는 많았습니다. 아버지를 괴 괴롭힐수록, 가족에게 상처 상처를 입힐수록 나는 저 점점 영웅이 되어갔고, 이러한 나의 미 믿음도 한날 이 이기심일 뿐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고 저 정직한 척 했지만 나 난 거짓말쟁이였습니다. 그 날. 바 바로 그 그 날. 난 겁쟁이 겁쟁이였습니다. 지 짙은 회색 회색의 고 공간…… 나 난 일어서야, 바 반항하려고, 그래야 그 그래야 해 했는데…… 부 불빛이, 흐릿한 부 불빛 불빛이…… 수 숨이 마 막혀, 너 너무 가 갑갑해…… 소 손, 그 지 징그러운 소 손, 버 벌레 벌레 같은 손이, 그 손이…… 내 몸이 모 몸이 구 굳어…… 나 나는 소리 소리치지 모 못했습니다. 나는 비겁 비 비겁자입니다. 나 날 용서 용서할 수가 어 없습니다. 간신히 말을 끝낸 희원은 탈진한 듯 바닥으로 쓰러졌다. 다급하게 간호원을 부르는 의사의 고함소리가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고, 남편과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희원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남편은 매일 폭음이었다. 그 아일 그렇게 만든 건 모두 내 책임이야. 그 아인 몹시 외로웠고 사람을 그리워했지만 난 아버지로서 따뜻한 마음조차 나눠주지 못했어. 그 아이가 세상과의 갈등에 빠져 고민하고 방황할 때 난 아무런 도움의 말도 해준 적이 없어. 지독한 이기주의자, 난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어. 하루 하루를 술로 자학하며 보내던 어느 날.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만취한 남편이 욕실에 들어갔을 때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예감으로 황급히 문을 열어 제치자 남편은 타일 바닥에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남편을 뒤흔들고 불러보았지만 남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진 남편은 그 후로 영영 일어설 줄을 몰랐다.
  희원의 병세가 다소 나아질 기미가 보인다는 의사의 말에 나는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희원의 치료를 위해서는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남편의 죽음을 그대로 묻어둘 순 없었다. 병실 창문 너머로 여유롭게 바깥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희원을 보았을 때, 목구멍에선 울컥 불덩어리가 치솟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말야. 네가 죽인 거야. 네가 아버지를. 내게 등을 보이고 서있는 희원의 어깨를 마구 흔들어대며 나는 고함을 질렀다. 빳빳하게 경직되어 있던 희원의 어깨에 맥이 풀리면서 희원은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다소 치료의 진전을 나타내던 희원의 병세가 더욱 악화된 건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나서였다. 희원이 입원한지 열 달이 되어갈 무렵 병원 측에선 희원을 포기했다. 단념하지 말고 가정에서도 꾸준히 간호하라는 의사의 말은 아무 위안도 주지 못했다. 희원과 나, 둘만의 생활이 시작된 지 넉 달이 지났지만 희원의 입술은 더욱 더 굳어갈 뿐이었다.
  거실 가득 완연하게 자리 잡은 어둠을 바라본다. 벌써 몇 시간째 붙박이처럼 앉아있는 나의 손 안엔 미지근해진 사과가 들려있다. 나는 손톱으로 사과의 속살을 쿡쿡 찌르고 긁어낸다. 사과에선 흘러나온 단물로 인해 손바닥은 끈적끈적하다. 흠집투성이의 사과를 휴지통에 버리고 싱크대로 간다. 수도꼭지를 틀고 흐르는 물에 양손을 맡긴 채 그대로 서있다. 희원과 나 사이에 연결된 질긴 끈도 이처럼 시원스런 물줄기에 깨끗이 잘려나갈 수 있다면. 설령 성욱의 의견처럼 희원을 미국으로 보낸다 해도 난 결코 자유롭지 못하리라. 어느 먼 곳에서도 희원이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나는 그 아이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허우적거릴 것이다. 아, 남아있는 나의 삶에 무거운 업보처럼 희원을 등에 지고 살아가야 하다니.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한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긋이 누른다.
  지겨워.
  신음소리다. 꼼꼼히 도배된 어둠을 뚫고 희원의 신음소리는 미세하게 진동한다. 나는 희원의 방문 쪽으로 날카롭게 시선을 돌린다. 참을 수가 없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화를 삭이지 못하는 사람처럼 씩씩거리며 나는 불도 켜지 않고 희원의 방으로 휘적휘적 걸어간다.
  활짝 문을 열어 제친 순간 나는 감전당한 것처럼 제자리에 꼿꼿이 멈춰 선다. 이 광경을 어떻게, 도대체 이 장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만 아연해져서 말문이 막히고 만다. 보안등 불빛으로 희미하게 드러난 희원의 나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출렁인다. 벌거벗은 몸의 희원은 엎드려 누운 채로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고 있다. 날 가지세요. 내 몸뚱아리 전부, 당신 마음대로 가지세요. 날 가져요. 당신 원하는 대로 날 가지세요. 희원의 알몸은 나를 조롱하는 듯 뽀얀 살갗을 꿈틀거린다. 낮에 보았던 성욱과 나의 관계를 조소하며 비양거리고 있는 희원을 보자 심한 모욕감에 치가 떨린다. 나는 희원에게 달려들어 손바닥으로 힘껏 내리친다. 그동안 쌓여왔던 가슴 속의 울분을 모조리 털어내려는 듯 내 손바닥은 사정없이 희원의 아랫도리를 두들긴다. 몹시 아플 것이 분명한데도 희원은 일체 반항을 하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그만 제풀에 지쳐 허탈하게 손을 떨군다. 희원의 눈가엔 물기가 서리고, 나의 매운 손자국 때문에 아랫도리는 발갛게 부어오른다. 나는 멀건히 희원의 벗은 몸을 내려다보며 애연함을 느낀다. 화냥년. 어쩌면 희원은 내게 화냥년이라며 침을 뱉고 싶은 심정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마음껏 비웃으렴. 나는 제대로 중심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면서 희원의 방을 나온다.
  잠을 이루려고 노력해보지만 정신은 오히려 또렷또렷하다. 침대에서 수없이 뒤척거린 나는 드디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작업실로 간다.
  오랫동안 닫혀있던 작업실은 마치 폐품 창고처럼 온갖 잡동사니들로 꽉 들어차 있다. 이젤은 펼쳐진 채로 서있고 서로 다른 크기의 캔버스엔 미처 완성되지 못한 밑그림만 달랑 남아있다. 화구 세트 위엔 깎다만 색연필과 부러진 지우개, 빨지 않아서 못쓰게 된 크고 작은 붓들. 빠레트엔 제멋대로 뒤섞여 딱딱하게 굳어버린 물감. 심지어는 먹다 남긴 식빵에 곰팡이가 슬어있고 조금 읽다가 내던진 책 나부랭이들도 어지럽게 널려있다. 그림은 내게 있어서 유일한 신앙이었는데. 망가진 내 모습을 확인하는 것 같아 자꾸만 슬퍼진다. 이 모두가 희원 탓이다. 희원 때문에 모든 것이 일그러지고 엉망이 되어 버렸다. 전부 희원 때문에.
  홍차에 위스키를 섞어 홀짝홀짝 마신다. 잠의 끄나풀은 완전히 달아나버려서 이대로 밤을 꼬박 새울 듯싶다. 작업실 도처에 깔린 장애물들을 용케 피해가면서 방 안 곳곳을 이리저리 누비고 다닌다. 나는 결심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 성욱의 도움도 필요가 없다. 오로지 나와 희원 두 사람만이 정면으로 대결해야 한다. 될 수 있는 한 멀리, 아주 멀리 희원에게서 떠나야 한다. 아니, 내 기억 속에서 희원의 존재는 깡그리 무시되고 사라져야 한다. 손에 들린 찻잔이 부르르 떨려 찻물이 쏟아진다. 나는 허겁지겁 바닥을 훔치며 사방을 둘러본다. 은밀한 어둠 속에 가려진 나의 비밀스런 음모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느 새 빛은 방 한쪽 구석으로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한다. 나는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고 조금씩 스러지는 밤의 음영을 바라본다. 작업대 위에 나란히 놓여있는 여러 석고상들의 윤곽은 하나의 또렷한 선과 면으로 살아난다. 밝음과 어두움이 대조적으로 자리 잡은 석고상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다. 나는 쥴리앙의 얼굴로 손을 가져간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우뚝 솟은 콧날. 매끄러운 턱 선. 온기라고는 조금치도 없는 석고상의 차가운 살갗을 파고든다. 으스스 돋는 소름 때문에 나는 팔과 다리를 쓰다듬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궜으면. 내 발걸음은 욕실로 향한다. 욕조 가득히 더운 물을 채우고 비스듬히 몸을 눕힌다. 목 언저리에서 찰랑거리는 물은 장난스럽기조차 하다. 나른한 몸뚱아리는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홀가분함을 느낀다. 주위와의 복잡한 관계 맺음도, 끊임없이 마찰하며 갈등하는 갖가지 상념들도 말끔히 지워버릴 수 있다면. 나는 좀 더 깊숙이 몸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는다.
  수증기로 인해 뿌옇게 흐려진 거울의 표면을 닦아낸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두 볼과 탄력 있는 젖가슴을 가진 여인이 우두커니 서있다. 잃어버린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엔 너무 늦지 않았을까. 예전의 그 활기차고 생기 있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 허물어진 나를 온전하게 일으켜 세우고 싶다.
  실로 오래간만에 옷장에서 외출복을 꺼내 입는다. 젖은 머리칼이 마르기도 전에 집을 나선다. 딱히 목적지가 정해져있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무작정 아침거리를 걷기로 한다.
  아파트 경비실을 지날 때 나는 일순 긴장한다. 사람을 만나 인사하고 대화하고 눈길을 부딪히는 일상적 행위들이 두렵게만 느껴진다. 나는 뒤꿈치를 들고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 나간다. 몹시 피곤한 모양인지 경비원은 앉은 채로 졸고 있다. 아파트 현관을 빠져나온 나는 들이마셨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낸다. 도로변 저만치에선 신문을 가득 실은 어린 소년이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희붐한 새벽길을 달리고 있다.
  얼마만에 즐겨보는 바깥 공기인가. 코끝을 스치는 서늘한 바람은 무척 생소하고 낯설기까지 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가로수를 따라서 나는 발길 닿는 데로 걸음을 옮겨놓는다.
  아침 꽃시장은 일찌감치 나선 소매상인들로 인해 제법 시끌벅적하다. 수천수만 송이의 온갖 꽃들이 내뱉는 진한 향기에 이끌려 나는 성큼 가게 앞으로 다가선다. 노랗고 빨간 원색의 꽃들에 둘러싸여 자주빛 국화는 가게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 색상이 화려한 여러 가지 꽃 중에서 자주빛 국화는 유독 내 시선을 끌어당긴다. 애틋한 그리움을 자아내는 자주빛 국화의 수수한 매력에, 나는 까닭 모를 흥분과 질투심을 느낀다.
  자주빛 국화를 무척 좋아하시나보죠?
  꽃을 포장하면서 주인 여자가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넨다. 아뇨. 내가 아니라 희원이가 좋아하는 겁니다. 죽은 제 어머니가 평소 아끼던 꽃이니까요. 국화가 한창일 무렵이면, 그 아인 언제나 자기 방 책상 위에 자주빛 국화를 보란 듯이 펼쳐놓곤 했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죽지 않고 살아서 해마다 자주빛 국화로 다시 태어나곤 했던 겁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친절하게 대답한다. 한아름이나 되는 국화다발을 보듬고 나는 도망치듯 시장을 빠져나온다.
  조금만 기다려. 네가 사랑하는 죽은 어머니 곁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이제 널 보낼거야. 난 네게서 아주 멀리 달아나고 싶어. 이 지긋지긋한 미궁 속에서 탈출하고 싶어. 국화 다발에 얼굴을 묻고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희원과 나의 뒤엉킨 연줄을 끊고 저 파아란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리라. 고개를 들어 맑게 개인 하늘을 올려다본다.
  경비원은 아파트 현관 계단을 청소하고 있다. 나는 꽃다발로 얼굴을 가리고 슬쩍 지나친다. 오랜만입니다 라는 경비원의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날아온다. 내 뒷모습을 훔치고 있을 경비원의 호기심어린 눈초리가 스멀스멀 뒤통수를 기어오른다. 당혹스러워진 나는 황급히 걸음을 옮긴다.
  집 안은 여전히 잠들어 있다. 희원의 방문 앞에서 귀를 기울이지만 아무 기척도 없다. 나는 꽃다발을 들고 욕실로 간다. 물을 채운 세면대 안에 꽃을 담근다. 부엌을 샅샅이 뒤져 푸른빛이 감도는 화병 하나를 찾아낸다. 수세미에 비누까지 묻혀 화병의 표면을 정성스레 닦는다. 가위로 꽃의 줄기를 알맞게 잘라낸 다음 화병 가득히 꽃을 꽂는다.
  커튼을 젖히고 꼭꼭 잠겨있던 거실의 유리문을 연다. 베란다를 장식했던 자잘한 화분들은 이미 죽어있다. 화분 속의 식물들은 바싹 말라 비틀어져 손끝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바시시 부서질 것만 같다. 생기를 잃어버린 화분들을 한데 모아버리고 나서 자주빛 국화로 장식된 화병을 들고 온다. 베란다 밖으로 삐죽이 나간 화분 받침대에 위태롭게 화병을 올려놓는다. 꽃을 내려놓는 손끝이 심하게 떨리고 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결에 꽃잎이 파르르 경련한다.
  세탁 바구니를 철철 넘쳐흐르는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겨 손빨래를 한다. 집 안 곳곳에 쌓인 먼지와 때를 깨끗이 떨어낸다. 거울 앞에 앉아 얼굴과 머리 모양을 가다듬고 나는 다시 외출 준비를 한다. 안녕. 현관문을 닫고 집을 나서며 나는 희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모처럼 만의 시내 나들이다. 나는 일부러 도착 지점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버스를 잡아탄다. 덜컹거리는 자체의 진동에 몸을 맡기며 달아오르는 흥분을 삭인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난 희원의 속박에서 영원히 풀려나게 될 것이다. 나는 자유로워진다. 희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사람들과 차량들의 물결로 거리는 번잡스럽다. 발을 밟거나 밟히기도 하고 어깨를 부딪히면서 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만 혼자 뚝 떨어져나간 것 같은 소외감을 느낀다. 서럽게 밀려드는 허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 주위를 둘러보지만 거리의 풍경은 황량하고 쓸쓸하기만 하다. 희원도 그랬을까. 나를 슬프게 하는 이 막막한 기분을 그 아이도 경험했을까. 지독한 외로움을 되씹다 못해 남몰래 흐느끼진 않았을는지. 나는 왜 희원의 방황을 방관하고 외면했던가. 어머니와 딸의 관계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쩜 우린 좋은 사이로 지냈을는지도 모르겠어요. 언젠가 희원이 내게 던진 말처럼 우리의 만남은 애초부터 어긋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난 희원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일찌감치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나는 희원에게 진정으로 최선을 다했던가. 그 아이에게 좀 더 충실할 수 없었던가. 나는 가슴이 답답해져서 숨을 크게 몰아쉰다.
  백화점 지하에 있는 식품 판매부로 발걸음을 돌린다. 불안감을 감추려는 듯 나는 허겁지겁 야채와 통조림 등을 집어 든다. 희원을 위해 모처럼 맛있는 식단을 차리려고 했는데. 내가 그만 시장에 가고 없는 사이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질 줄이야. 누군가 희원의 사고를 추궁한다면 나는 그럴 듯하게 변명을 할 것이다. 나의 치밀한 계획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거나 내 등을 토닥거리면서 위로의 말을 덧붙일 것이다. 훌쩍훌쩍 거짓 눈물을 흘리고 있을 내 모습에 문득 혐오감이 인다.
  지금쯤 희원은 길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하루에 두어번 남짓한 배설을 위하여 화장실로 달려갈 것이다. 용변을 보고 나온 희원에겐 자주빛 국화가 얼른 눈에 띌 것이다. 그 진한 국화 향기의 유혹에 이끌려 몸놀림이 둔한 희원은 손을 뻗치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희원의 손아귀에 꽃이 들렸을 땐 이미 늦었을 것이다. 희원은 몸의 중심을 가누지 못하고 기우뚱거리다가 베란다 밖으로…….
  어머, 웬일로 바깥출입을 다하셨어요?
  얼굴이 많이 야위었네요. 그래, 따님은 좀 차도가 있나요?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동네 여자 두 명이 용케 내 얼굴을 알아보았을 때, 몹시 당황한 나는 들고 있던 토마토 케챂병을 떨어뜨린다. 산산조각이 난 유리병과 쏟아진 붉은 케챂을 내려다보는 내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스르르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다.
  몹쓸 인간들이야.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는담.
  동네 여자의 걱정스런 푸념을 들으며 나는 그제서야 정신이 퍼뜩 든다. 나는 희원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고 있는가. 지난밤에 보았던 희원의 나신이 머릿속을 휑하니 지나가고 병원에서 있었던 희원의 고백이 자막처럼 스친다. 그 손 징그러운 그 손…… 양손 가득히 들고 있던 물건들을 내동댕이치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달음박질친다. 오, 제발 무사하기를.
  낭자한 피 흘림. 여기저기 뜯겨져 나간 살점들. 아파트 현관 앞에 펼쳐진 사고의 잔인한 광경들을 확인하기가 두려워 나는 아파트 비상계단으로 올라간다.
  거실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나는 베란다로 향한다. 풍성하게 꽂혀있던 자주빛 국화는 온 데 간 데가 없다. 나는 난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화병의 깨진 사기조각과 얼크러진 국화꽃들이 널브러져있다. 희원은, 희원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이미 숨을 거두어 병원으로 실려 간 것은 아닐까. 나는 다급하게 희원의 방문을 열어 제친다.
  어으으……어으……어으……아으
  희원은 내 앞으로 불쑥 꽃을 내민다. 의미도 분명치 않은 희원의 신음소리가 갑자기 어머니, 꽃이, 꽃이 피었어요 라는 확실한 문장이 되어 귓전을 때린다. 어머니, 꽃이 피었어요. 어머니, 꽃이, 꽃이 피었어요. 어머니, 꽃, 꽃이…….
  말라붙은 눈물샘이 순간적으로 솟구치자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려고 나는 입술을 깨문다. 희원을 와락 껴안고 희원의 얼굴에 내 얼굴을 비벼댄다.
  난데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열려진 문을 통해 끊임없이 소리를 내지르는 전화기를 바라보며, 희원을 부둥켜안은 손아귀에 힘을 꼬옥 준다. 수화기를 들면 이젠 씩씩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희원의 어머니인걸. 이 아인 내가 감싸줘야 할 작고 소중한 내 딸이야. 언젠가 어둠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감추어진 아픈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난 희원을 보살피고 기다려야 해.
  뼈가 으스러지도록 껴안은 희원과 나의 품 안에서 자주빛 국화 꽃잎이 우수수 흩어져 내린다. 뜨겁게 달구어진 희원의 붉은 피가 내 혈관 속을 파고들어 힘차게 흐르는 것처럼 찌르르 찌르르 온 몸이 떨려오기 시작한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희원이가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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