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풍(軟風) 산문(山門)을 나오며 미인은 두 팔을 벌려 새의 날갯짓을 따라했다 우리의 사이로 연한 바람이 불어들고, 미인이 입은 외투가 바람에 날리고, 외투에서 빠져나온 실올이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던 내 입술에 달라붙었다 나는 저만치나 가는 미인을 쫓는 대신 숨바람을 후후 입술로 불어내며 내연이라는 어려움과 외연이라는 다름을 오래 생각했다 박준 : 시인. 1983년 서울 출생.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있다. 제31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니클라스 루만은 『열정으로서의 사랑』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사랑의 문제를 ‘불안정성’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한다. 루만에 따르면 사랑에서 문제는 변하는 존재인 인간이 마찬가지로 변하는 다른 인간과 만나 변하지 않을 것을 기대하는 데서 발생한다. 현대인의 사랑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관계를 안정적으로 메어줄 외부의 지지대들이 사라지며 순수하게 개인의 인격적인 자원들로 이를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진정한 자유연애의 세상에서 연인에게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됐다고 말하는 것은 연애하는 자의 일종의 권리처럼 보인다. 한때 상대의 마음을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으로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이 있다. 상을 수상한 바 있다.
단언컨대, ‘웰빙’이라는 말이나 ‘힐링’과 같은 언어는 2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물이다. 공적담론의 기본 검색 플랫폼인 ‘뉴스라이브러리’를 검색해 보면 쉽게 확인 가능하다. 근래의 신종용어다. 대체 이 20년은 어떠한 시간이었나? 자본권력 독점과 사회/복지국가 해체를 핵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지배의 역사가 아닌가? 그 폭력적인 시간 속에서 ‘웰빙’이니 ‘힐링’이니 하는 모순된 욕망, 역설적 언어들이 폭발적으로 융기한다. 사실 자본은 언어와 주체, 문화를 발명하고 이를 통해 축적을 도모함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다. 그리
이스라엘 출신 현대미술가 오마르 파스트(Omer Fast)의 2008년 영상작품 제목은 이다. 이 제목을 신이 인간의 아름다운 외모나 겉으로 드러나는 세속적인 매력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는, 아마도, 별로 없을 것이다. 대신 신앙심 깊은 누군가는 종교에 무조건적으로 귀의하는 삶의 가치를 떠올릴 것이고, 박애 정신이 강한 누군가는 헐벗고 굶주린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새길지도 모른다. ‘신에게 예뻐 보이는
개봉 당시의 떠들썩함도 한층 가라앉아 이제는 무심히 케이블 영화채널에서나 만날 수 있지만, 여전히 강한 해석 욕망을 자극하는 영화 한 편이 있다. 전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던, 특히 주제도 주제려니와 모호한 결말 처리 방식 덕택에 무명의 관객들에게마저 가장 적극적인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영화 Inception(2010)이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감독들 중에서 비교적 지적인 연출을 주로 선보여 왔던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의 작품이며, 그의 전작들에서부터 꾸준히 문제삼아왔던 꿈 또는 무의식의 세계를
야만스런 유대인 학살이 자행된 아우슈비츠의 어느 가스실. 이곳에서 독일의 한 작곡가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히틀러의 정신적 아버지이기도 했던 그의 음악은 반유대주의의 공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일종의 불문율처럼 공개적인 연주가 금지되고 있다. 사실상 비공식적인 ‘금지곡’인 것이다. 이 작곡가를 둘러싼 논쟁의 소용돌이는 정치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현재 진행형이라 해도 좋겠다. 더군다나 올해는 한 시대를 풍미하다 못해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 작곡가의 탄생 200주년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열 편
김기덕의 영화는 쉽지 않다. 물론 텍스트의 해석적 난이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려움이란 그의 영화가 영화와 관객 사이에 관습적으로 확보된 거리를 무시한 채 확 찌르고 들어오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부정적인 의미로든, 긍정적인 의미로든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극장 좌석에 편안히 앉아서 관람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언제나 등 뒤로 뿌듯하게 느껴지는 소파의 감촉을 느끼면서 스크린 안쪽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란에 비해 안온한 여기, 지금의 자리를 새삼스레 확인하며 관람할 수 있는 여느 영화와는 다르다. ‘영화’ 자
이른바 국가정보원 선거법위반 의혹사건(댓글사건)으로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상에서의 댓글문화가 화제로 부각되고 있다. 댓글이란 온라인상에서 특정이슈의 글에 대해 실명, 또는 익명의 대화자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을 일컫는데 SNS와 온라인커뮤니티상에서는 그 현상에서 다소 차이가 난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에서는 그 속성상 친구맺기나 친구초청하기 등의 과정을 거쳐야하므로 대개의 경우 활동공간의 정서적, 이념적 스펙트럼이 거의 동일한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여기에 등장하는 댓글에서 악성댓글(소위 악플)은 그리 흔하지 않다.
(이하 ‘’)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큰 틀에서 다큐멘터리란 “나 혹은 우리는, 당신에게, 그들 혹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얼개를 취한다. 이러할 때 은 ‘천안함 사건’과 관련된 국가의 입장을 온당히 수용할 수 없는 ‘나 혹은 우리가’, 국가의 발표를 이미 상식으로 수용한 ‘당신’에게, ‘그것’이 간단히 넘겨서는 안 될 작위의 결과임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미리 말하건대 나는 이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천안함 사건’에 의문을 제기하는 제스처 자체가 문제일 리 없
가을이 영근다. 30년 만에, 또는 40년 만에 찾아왔다던, 그래서 최악의 전력난이 예상된다던 2013년의 더위도 계절 앞에 무릎을 꿇고 벌써 저만치 물러났다. 바닷가와 계곡을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빼곡 채웠던 그 많은 사람들도 덩달아 물러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진정한 휴가는 지금부터다. 더위를 피해 나간 여름철 휴가는 휴가라기보다는 피서라고 하는 편이 낫다. 온가족이 함께 조용한 휴가를 지내기 적합한 계절을 꼽으라면 누구나 가을을 첫손에 꼽을 듯하다. 청명한 가을 산과 하늘을 만끽하며 가족 단위의 휴가를 즐기기에는 요즘 유
무서운 기세로 천만 기록을 갈아치운 을 두고 몇 가지 잡음이 있었다. 대략적인 요지는 이 영화가 과연 천만 영화에 어울리느냐는 것. 천만 영화의 자격 같은 것이 따로 있을 리 만무하지만 관객에게 사랑받은 정도에 비해 영화에 대한 평가가 박한 건 사실이다. 영화의 만듦새는 썩 나쁘지 않았음에도 잘해야 200~300만 영화에 어울리는 영화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었고 많은 평자들은 이토록 무난한 영화에 왜 이토록 많은 관객들이 열광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했다. 대상에 있지도 않은 잣대를 들이대 줄 세우기를 하는 논리에
가수 싸이가 지난 5월 9일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국제가수가 되기까지’를 주제로 특별 강연을 펼쳤다. 이날 싸이는 이 26위에서 7계단 하락한 33위를 기록한 것에 대해 “빌보드에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한국의 음악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다.”라고 말했다.빌보드 차트 2위를 차지한 에 비교한다면 다소 실망스러운 성적이지만, 은 ‘싸이 스타일’이 여전히 세계무대에서 효용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어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싸이 스타일’은 한국적인 흥
만약 우리 몸에서 이름표를 붙이기에 가장 알맞은 자리를 한 군데만 고르라면 그건 아마도 각자의 이마일 것이다. 대개 이름이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며 스스로의 본성을 표현하기 보다는 타인의 시선을 위해 맞추어진 틀에 가깝다. 다시 말해 이름의 본질과 기준은 외부에 있다. 이름이라는 틀을 기준으로 대상을 판단하는 건 쉽고 편하지만 때론 대상의 본질을 놓치거나 왜곡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소위 ‘예술영화’라는 표현이 그렇다. 예술영화라는 단어에는 다양한 집단의 복잡한 욕망이
최근 일명 ‘상지대학교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 사건’이 화제가 됐다. 사건인즉슨, 상지대학교 디자인학부 학생들이 일본의 욱일승천기를 배경으로 나치식 거수경례를 하는 동영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동영상은 제작자 중 한 명이 자신의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뒤 급속도로 인터넷상에서 유포됐다. 동영상에 등장하는 학생들의 얼굴은 이미지로 가려져 있으며, 사진 하단에는 ‘DESIGN’이라는 과 로고가 새겨져 있다. 동영상 유포 이후 상지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학생들의 경솔한 행동을 질타하는 글들이 이어졌다. 한 누리꾼은 “어느 한편에서는
올해 상반기 한국영화의 경향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알 수 없음’이다. 영화 시장이라는 게 원래 예측이 불가능한 곳이라곤 하지만 올해만큼 이변이 속출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박스오피스 상위권은 모두 한국영화로 도배되는가 싶더니 급기야 2월에는 한국영화 점유율이 무려 82.9%에 도달했다. 한국영화의 위기론이 거론됐던 2008년 5월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7.8%에 불과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가히 이상현상이라 부를 만하다. 그 기적의 한 가운데 이 있다. 14일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몇 년 전 한국에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 크게 화제가 된 바 있다. 《근대문학의 종언》의 요지는 탈(脫) 이데올로기의 문학은 오락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당시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찬반논쟁이 펼쳐지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은 ‘낡은 헤겔주의적 유산’에 지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은 헤겔의 《예술의 종언》에 크게 빚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헤겔은 예술은 ‘물질을 통한 정신의 표현’이라고 봤다. 그리스 조각이 헤겔이 본 예술의 최고 이상향이다. 헤겔이 말한 ‘
때론 영상보다 오래 기억되는 테마음악이 있다.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된 둘을 구분 짓고 나눈다는 게 의미 없는 일이란 건 알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되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나보다. ‘콘트리 로드’가 그런 영화음악이다. 존 덴버의 유명 포크송 ‘Take Me Home Country Road’ 가 아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대표 애니메이션 에 나오는 혼나 요코가 부른 ‘콘트리 로드’다. (‘Country Road’도 아니다. 반드시 ‘콘트리 로드’로 읽어야만 한다.) 존 덴버의 ‘Take Me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이 1993년 라디오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이 표현은 최근 한 대선 후보의 출마선언문에 인용되면서 우리 사회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윌리엄 깁슨의 말은 출마선언문이 발표되자마자 각종 보도매체와 SNS를 통해 확산되었고, 화자와 화자의 저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곧 책 판매량으로 이어졌다. 말하자면 첨예한 현실정치의 한 가운데서 80년대 하위문화의 일종인 ‘사이버 펑크’문학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보기에 따라선 정치와 사이버펑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이름을 붙여 이해한 척 하고 싶어 한다. 모두가 정의를 말하지만 아무도 정의의 참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쉽게 용서를 입에 올리는 사람치고 진정한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이는 드물다.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수많은 물음표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었지만 끝내 밝힐 수 없었던 감정은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사랑을 말하는 입은 많지만 사랑을 정의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백 명이 있으면 백 가지 형태의 사랑이 있다고 할 만큼 사람마다 다른 것이 사랑이다. 한편으론 누구나 다른 이의 사랑이야기에 금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