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반전이냐 호전이냐를 둘러싼 논쟁에서 조국의 전쟁을 옹호하는 입장에 섰다. 베버가 전쟁 전부터 유럽 내 민족들의 평화공존을 주장해왔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런 선택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심각한 실존적 번뇌를 겪었을지 상상에 어렵지 않다. 다만 베버는 조국의 생존이냐 타국과의 평화공존이냐의 양자택일로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조국의 전쟁이 유럽의 평화공존을 위한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베버는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등 작은 민족과는 다른 독일의 역사적 사명을 환기하면서, 서유럽의
통상적으로 생각할 때, 보통 한 편의 연극이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희곡, 배우, 무대, 조명 등등. 그런데 한편 연극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한 오랜 탐구의 역사가 있었고, 그 안에서 영역을 확장해온 것은 그로토프스키가 ‘가난한 연극’을 통해 주창했던 바와 같이 배우와 관객이다. 이는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탈근대적 사상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 이성의 지배를 받는 신체와 감각의 복권. ‘연극의 연극화’, ‘문학의 시녀가 되지 않는 연극’과 같은 슬로건들은 희곡이 담보하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로고스 전통에 대한
IMF 위기가 몰아치던 시기, 중학생인 나와 친구들의 교실에는 침묵이 가득하였다. 누군가는 원조교제를 이유로 제적당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부모와 함께 야반도주하여 사라졌다. 소문도 없이 사람이 사라지는 교실에는 항상 빈자리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 힘겹게 고등학생이 되었다. 수업시간이 끝나면 야자가 시작하는, 그 지옥같은 생활에 나도 끼어들었다. 한 반에 대여섯명은 윗층에 있는 (우등반) 열람실로 올라갔고, 나머지는 몇 자리가 빈 교실에서 야자를 하였다. 핑계를 대고 도망칠 필요도 없었다. 교사들은 윗층에 배치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배울 것인가 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이다. 근대 산업 사회로의 진입 이후 양적 팽창을 통한 주입식 교육이 한국 사회를 발전시켜왔다. 하지만 이런 구시대적 교육 방식은 한계에 직면했다. 국내외 학교 교육 현장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혁신적 교수-학습 모델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다양한 실험 중 플립수업(flipped class) 혹은 거꾸로 수업(inverted class)은 새로운 교수-학습 모델로서 주목 받고 있다. 양숙희는 「플립수업이 학습자의 수업참여와 수업만족 및 자기효능감에 미치는 영향에
지금, 이곳, 우리의 세기 21세기를 유물론적 유한성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에 이견이 없어 보인다. 더 이상 신이나 진리 따위의 형이상학적 신념은 합리주의적 이성의 공동체들에서 추방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을 증식시키는 투자 기술과 그렇게 증식된 재화의 풍요 속에서 쾌락의 최대치에 도달하기 위해 고려되는 신체와 심리에 관한 자기관리의 과학일 뿐이다. 여기서의 정치는 개인의 신체에 관련된 쾌락의 권리, 즉 생명과 신체의 자유로운 운용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어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으며, 상대주의의 꼬리표를 달고
얼마 전부터 내가 일하는 학교에서도 결국 학원민주화를 위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취업기관으로 전락한 학교가 예술교육을 탐탁찮은 눈길로 흘겨보는 것도 모자라 숫제 정원을 줄이고 무리한 요구를 잇달아 제기한 탓이다. 마침 학교는 상의도 없이 예술계열의 정원을 빼서 문만 열면 입학생들이 줄을 잇고 취업도 잘 된다는 실용음악과를 개설하겠다고 서둘렀다. 무시당할 만큼 당했단 생각에 예술계열 교수들은 기업화된 대학을 만들어가는 학교 경영진의 방침에 항의하는 학원민주화 비상대책위를 만들었다. 학생들도 같은 이름의 모임을 만들어 대자보를 붙이고 공
지난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끝났다. 그리고 3일이 지난 16일은 세월호가 침몰한 지 2주기가 되던 날이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함께 생각하려는 이유는 단지 시기적 인접성 때문은 아니다.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리는 선거와 가히 현대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세월호 사건. 그러므로 이 생각은 비극과 정치, 비극과 민주주의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사유하는 것의 필요성에서 비롯하였다. 체코의 작가이자 전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은 정치를 일컬어 불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정치라는 예술을 실현하기 위해서 정치
“어쩐지 자신이 원고지가 아닌 삶 속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네.”라고 이기호는 소설집 앞 장에서 수줍게 고백한다. 그리고 곧이어 이 한 문장을 40편에 달하는 소설 전체에 걸쳐 길게 늘인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에 등장하는 소설 대다수에서는 ‘오해’와 ‘오해 풀림’의 과정이 반복된다. 중학생 아이에게 폭언 및 협박을 하여 고소당한 53세 중년 남성이 “그게…… 태연 양 때문에 그랬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자신은 아이돌의 험담을 하고 다닌 중학생을 응징한 것이었음을 뒤늦게 밝힌다거나(「벚꽃 흩날리는 이유」), 날마다 계
장운혁의 철학과 박사학위 논문 「존 롤즈의 『정의론』과 기업지배구조 연구 ―이해당사자 민주제의 정당성 근거를 중심으로―」 는 ‘기업(business)’이라는 이익 창출 공간의 의미를 “근로자들이 자신의 삶을 계발하고 타인과 인간관계를 맺고 넓히는 사회적 공간”으로 확장시켰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그는 이러한 ‘기업’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공간 안에서 근로자들은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기업과 근로자간 계약은 ‘자발적’임을 명시하고 있지만 이 안에 불공정한 요소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근로자의 권리와 의무가
인문학에 또 위기가 도래했는가? 근래 다시 ‘인문학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대학가를 떠돌며 싸우고 있다. ‘프라임’ 때문이다. ‘프라임’이 뭔가요? 사람들은 묻는다. 내가 있는 대학도 한차례 폭풍이 지나갔지만 프라임 사업 신청을 하지 않은 학교나 대학 바깥 사회는 대체 프라임이 뭔지 아무도 모른다. 알아듣지 못할 암호 같은 말은 일부러 그렇게 붙인 것 같다. 교육부가 추진하는 초대형 대학구조조정 프로젝트 중의 하나인 프라임(PRIME) 사업이란 ‘산업수요 연계 교육 활성화 선도대학 Program for Industrial nee
최근 가장 기뻤던 뉴스는 ‘세월호 변호사’ 중 한 명인 박주민 변호사가 총선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소식이다. 집권여당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정당 소속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기뻤다. 그가 국회의원이 되지 못하는 것보다는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가장 슬펐던 뉴스는, 선거 기간 동안 세월호 유가족이 도라에몽 인형탈을 쓰고 박 후보를 도왔다는 보도였다. 박주민 선거 캠프의 최일곤 씨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다. “유가족들은 자신들이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까봐 묵묵히 주어진 일만을 하며 지냈다. 영석이 엄마는 아침
최근 위안부 문제가 화제이다. 한일 양국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합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많은 한국인의 공분이 이어진 한편,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날선 여론이 아직 다분히 존재한다. 생각해보건대 우선 피해자가 이중의 불가역한 일을 강요당하는 기이한 사태에 대한 공분은 이해되는 반면, 후자의 경우 오히려 다소의 이물감이 남는다. 이를테면, ‘객관성’과 감정은 적대적인가? 같은 저자의 또 다른 저서인 『화해를 위하여』는 맥락에서 소거되어 있는 듯 보이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감상적으로만 수용해야 하는가? 도
기독교는 현시대 세계체제의 근간인 유럽발 근대의 전사(前史)로서 특별한 위상을 지닌 종교체제이다. 그것의 위상은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유럽의 정신사적 근원으로서 계몽시대 합리적 이성과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 공화정 체제에서도 기독교는 살아남았다. 유럽의 근대는 기독교의 막강한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하는 도정이면서 근대에 대한 기독교측의 대응과 타협이라는 양면의 역사다. 신 앞에서의 만민평등을 기치로 내세운 기독교 복음주의 선교는 비유럽 체제의 억눌린 특정 계층의 사상적 구심점으로서 구체제의 형해화와 그것으로 수반하는 근대체제의 서구
정해진의 미술학과 박사학위 논문 「회화창작의 소재변용과 그 작품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용어 중 하나는 ‘이종교합’이다. 그녀의 설명을 따르자면 20세기 이후 미술에서는 소재를 단순히 재현의 대상으로만 두지 않고 소재 자체의 (주어진) 본성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이른바 포스트 모던적 시도들이 행해졌다. 그 시도들 중 하나가 바로 이질적 소재의 결합, 즉 ‘이종교합’이다. 정해진은 다시 이종교합을 ‘이질적 사물인 동물성과 식물성, 생물과 무생물 등을 상호 결합시키는 방식’이라고 좁혀 설명하고는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
사람은 누구나 결국은 혼자다. 인간의 실존은 고독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존재인 까닭에 고독을 감당하기는 어렵다. 혼자는 외롭다. 그러나 그것이 고독이냐 고립이냐에 따라 다르다. 불행히도 그 둘을 구별하지 못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고독은 ‘자율적 고립’이고 고립은 ‘타율적 고독’이다. 우리는 고독에 대한 교육이나 훈련이 미흡하다. 인간의 사상과 문화, 그리고 예술과 영성 등은 고독의 힘겨운 숙성을 통해 발아된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 사회는 어설프다. 고독을 감내하지도 못하고 구별조차 되지 않으니 고독이 빚어낸 가치를 구현하지 못하
1. 오래된 기시감, 1984년의 영국 는 한국인의 정서에 친숙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 탄광촌에서 자라나 ‘발레리노’를 꿈꾼 한 소년이 마침내 예술극장 무대에서 멋지게 도약하는 마지막 장면을 지켜보며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한국 관객은 아마 없으리라. 기성 세대가 되물림한 경제적 궁핍과 성적 편견이라는 이중의 장애를 딛고 자신의 예술적 열망을 이루어낸 빌리의 이야기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기 마련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섣불리 좌절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해주는 듯하다. 최근까지도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공연이 심심찮
나의 사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다. 내가 문학·문화이론을 공부해오면서 가장 심취했던 분야가 있다면 그것은 기호학이었다. 바르트, 그레마스, 에코, 로트만 등의 저작을 읽고 그 독서법을 흉내내면서 텍스트를 읽는다는 재미를 최초로 맛보았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새로운 텍스트를 접할 때면 바르트의 에크리튀르론이나 그레마스의 기호학적 사각형을 떠올리며 그것을 읽는 버릇이 있음을 고백한다. 다키 고지와의 만남 또한 기호학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석사논문 준비를 위해 일본의 여러 기호학 연구서들을 탐독하기 시작할 무렵, 다키 고지의
대학원생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떠한 것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 자신의 ‘삶’에 관해서 쉽사리 ‘입’을 열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닐까 답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더 참담하게 만드는 언명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대학원생이 ‘입’을 잃어버리게 된 데에는 수많은 곡절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입’을 가지게 되는 순간, 그 누군가는 ‘대학원 사회’에는 더 이상 발붙이기 어려운 ‘타자’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어떤 발화는 스스로가 발 딛고 선 땅이 어떤 곳인지를 환하게 내려다본 그 순간부터
유인혁의 「식민지시기 근대소설과 도시공간」은 한국의 근대 문학을 공간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본다. 이제껏 근대 문학 연구에서 경성에 대한 분석은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식민통치 전략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법은 ‘지리적 협소함’이라는 난점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도시 빈민의 삶에 대한 묘사는 일부 외곽지에 한정되며, 소비문화에 대한 접근은 번화한 상업구역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도시의 통합적인 상, 그러니까 전체적인 감각을 파악하는 것이 소설의 전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문제의식을
활판인쇄술의 발명 이래로 번역과 정치는 늘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단적으로 마르틴 루터가 그리스어로 된 1519년판 에라스무스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을 때 당대의 서구 정치는 더 이상 예전 같을 수 없게 됐다. 동아시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알렉산더 파슨스 마틴이 헨리 휘튼의 『국제법의 요소들』(1836)과 요한 블룬칠리의 『법전으로 나타낸 문명국들의 근대 국제법』(1868)을 각각 『만국공법』(1863)과 『공법회통』(1879)이라는 제목 아래 중국어로 번역하고 그 책들이 중국을 경유해 일본과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