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다니던 대학에 물음표를 덧입혀 본 일이 별로 없다. 대학은 정의로운 공간이고 그 안에 존재하는 구성원들 역시 마땅히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대학원생 조교로 행정업무를 보는 것이, 시간강사로 강의하는 것이, 어느 순간 삶을 너무 ‘가혹’하게 만든다 싶기도 했지만 곧 내가 잘못되었을 것이라 생각해 버렸다. 지성의 전당, 진리의 상아탑, 그 공간에서 강의하고 연구하는 나는 행복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대학에서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을까?”하는 물음표가 문득 생겼다. 박사과정을 수료하고서도 몇 학기가 지난 때였다.
5월 17일 오후 6시 동국대에서 ‘학내 언론의 현황과 과제’라는 주제로 좌담회가 진행되었다. 2000년대 이후 미디어의 다변화와 학생사회의 해체적 여파로 인해 ‘학내 언론’은 큰 변화와 위기 속에 존립하고 있다. 좌담회는 각 대학 학내 언론사의 발행 현황을 공유하고, 향후 학내 언론의 역할과 전망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김선웅(서울과학기술대학교 학보사 『서울과기대신문』 편집장), 김현수(동국대학교 독립언론 교지편집위원회 『동국』 편집위원), 안혜숙(중앙대학교 대학원 학보사 『중앙대학원신문』 편집장), 정진호(동국대학교
과연 오늘날 대학은 과연 가장 정의로운 곳인가. ‘지성의 전당’, ‘학문의 상아탑’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신뢰받고 있는가. 구성원과 소통하지 않는 독재적인 권력은 투사 아닌 자들을 투사로 만들어냈다. 평범한 시민들로 하여금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이게 만들었고, 이제는 민중가요를 부르지 않는 대학생들로 하여금 대학 안으로 몰려든 경찰에 대항하여 손을 맞잡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제창하게 만들었다. 학생과 시민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세계에 대한 분노였고,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견고
* 1985년 대학원 총학생회 창설 멤버이자, 현재 우리학교에 재직 중인 권승구 식품산업관리학과 교수를 만났다. 창설 멤버 중 1대 회장단이었던 이재필(사회학과), 양정모(수학교육과) 선배님과 2대 회장단 장시기(영어영문학과), 이성현(공과대) 선배님 중 몇 분은 유선상으로 안부를 전해주었다. 20여 년 전의 일이라 기억이 뚜렷하지는 않다고 너털웃음을 짓다가도, 가만 골똘히 기억을 더듬으며 선배님이자 선생님으로서 진지하게 전해주신 여러 이야기들을 지면에 담아보았다. 인터뷰는 임세화(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원우가 진행했다. 대학원 총
* 편집자주 : 우리는 흔히 대학의 구성원으로 학생과 교수, 교직원을 거론한다. 그러나 대학에는 어딘가에 분명 존재하지만 단번에 떠올려지지 않는 구성원들이 있다. 본 르포는 보이지 않는, 보이지만 기억되지 않는 ‘대학 내 노동자들의 하루’를 재구성하고 그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기획되었다. 모두 실제 인터뷰에서 발화된 내용들로 구성된 사건들이지만, 다수의 전현직 조교, 각 건물의 경비관리원, 주차관리요원, 미화노동자들 수 명을 인터뷰하고 재조합하여 작성한 글이기 때문에, 특정 개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님을 밝힌다. 어느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무능하고 부패하며 무책임한 정권이 끝내 시민의 힘으로 무너졌다. 시민의 삶을 한 차례도 살지 않았던 사람을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뽑은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조작된 이미지와 어리석은 환상이 과거의 그림자와 범벅된 것을 가려내지 못하고 감정적으로만 판단한 까닭이었다. 그렇더라도 제대로 했으면 모를까 하는 일마다 무능하고 편협하며 퇴행적이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기본적 의미와 가치조차 모르는 자가 대통령이었고 설상가상 호가호위하며 그 무능한 대통령 뒤에 숨어서 온갖 악행과 치부를 일삼은 자들이 이 나라의 지도자
알랭 바디우라는 고유명의 반향이 울려온다. 국내에서 라캉이나 들뢰즈를 비롯한 여타의 인물들에 비해 인기가 덜한 것처럼 보이는 이 노학자에 대하여, 혹자는 데리다의 사망 이후 그를 프랑스 철학의 태두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나 역시 여러모로 그의 사유과정에 깊게 매료되어 있음을 밝힌다. 그가 보여주는 집합론의 아름다운 사용에 대해 감동할 뿐만 아니라 그가 논하는 진리와 주체의 정당한 필요성에 공감하며, 그로 인하여 나는 조건과 결론을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또한 바디우는 예술을, 특히 연극을 그들 자신의
세계 한편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난민이 발생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SNS에 자기 사진을 올리며 타인과 소통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는 소통이 아니다. 결국 어떤 세계에서든 현대인은 불안정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타자의 추방』에서 한병철은, ‘타자’를 소멸시키는 시스템을 우울한 현대의 근원적인 문제로 제기한다. 경험의 본질은 고통이며, 타자는 낯설고 두렵다. 그리고 ‘낯섦’과 ‘두려움’은 경험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오늘날 현대인은 타인으로 인한 고통을 회피하며 ‘같은 것’들 속에서 안전을 추구한다. 같은 것들끼리는 ‘차이’가 없으며
김주연의 논문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의 연극론 연구 : 희곡 을 중심으로」는 예브레이노프의 연극론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는 20세기 초 러시아 아방가르드 연극을 이끈 연출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연극을 ‘현실의 재창조’ 혹은 ‘내재적 욕망의 변형’으로 규정하였다. 김주연은 현대극의 상당 부분이 예브레이노프의 이론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예브레이노프가 제시한 ‘퍼포먼스’, ‘연극성’ 등의 개념들을 고찰하고 있다. 예브레이노프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혁명을 전후로
4월 5일 오후 4시 역사문제연구소 관지헌에서 ‘조교 문제 좌담회’가 개최되었다. 토론회는 ‘동국대 조교 사태’가 비단 동국대만의 문제가 아님을 인식하고, 타 학교의 조교 노동 실태를 공유하며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동국대학원신문사에서 주최한 이번 좌담회의 참여 단위는 , , 이다. 김민섭(연세대), 정혜진(성균관대), 최은혜(고려대), 한보성(성균관대), 홍덕구(동국대)가 패널로 참석했다. 임세화(동국대)가 사회를 맡았다. ‘근로’와 ‘
1513년에 완성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피렌체 공화정의 적이었던 메디치가에게 자신을 채용해달라고 설득하기 위해서 쓴 글이다. 그는 공화정의 외교관으로 활약하였고, 공화정 몰락 후에는 메디치 정권으로부터 고문을 받았다. 그런 그가 왜 이 책을 썼을까? 그의 저술 의도는 언제나 이 책의 독자들에게 혼란과 확신을 동시에 심어주었다. 교황청은 1559년에 이 책을 금서목록에 올렸다. 사후에 그의 이름은 ‘참주의 스승’과 동의어가 되었다. 반면에 혁명가들에게 마키아벨리는 정체를 숨긴 공화주의자로 읽혔다. 물론 이런 해석이 가능했
심화섭의 행정학과 박사학위 논문 「마을만들기가 주민의 지역공동체 의식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는 통칭 ‘마을만들기’로 불리는 정책투입요소가 지역 주민들, 보다 정확히는 지역 주민들의 공동체의식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를 다룬다. 이 논문은 현대사회의 발전이 이전 “근대화·산업화 시기처럼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양적팽창”이 아닌 “공동체의 붕괴를 회피하는” 질적 향상을 추구해야한다는 문제의식을 제시하고, 대안으로서 ‘마을만들기’ 정책을 서술함에 의의가 있다. 더불어 다양한 지역에서 설문조사를 실시한 후 그에 따른 해석 및 분석과
통상적인 정치철학적 독법에 의거해 볼 때, ‘폭력’이라는 단어에서 역동(dynamic)의 감각을 읽어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가령 폭력이라는 단어를 앞에 두고, 누군가는 ‘무력(force)/폭력(violence)’을 운운했던 소렐(G. Sorel)을, 또 누군가는 ‘주관적 폭력(subjective violence)/객관적 폭력(objective violence)’을 운운했던 지젝(S. Žižek) 등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독법은 정이현의 소설을 읽는 데 그리 많은 참조점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무슨 얘기인가? 정이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쓴다. “감각이란 빛과 색의 자유롭거나 대상을 떠난 유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신체 속에 있다. 색은 신체 속에 있고 감각은 신체 속에 있다. 그려지는 것은 감각이다. 그림 속에서 그려지는 것은 신체다. 그러나 신체는 더 이상 재현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을 느끼는 자로서 체험되어진 신체이다.” 예술을 재현의 영역에서 탈출시키고자 시도하면서 이야기되는 것은 감각의 표현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재현은 상정된 재현 대상과 그와의 동일성을 전제한 재현된 것의 관계이며, 이런 재현적 구도 아래에서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에게 문자는 인간을 게으르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문자로 무엇인가를 표기해놓으면 주객이 전도되어서 그 문자를 해석하느라 갑론을박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문자에 담긴 이데아를 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악명 높은 ‘시인추방론’과 일맥상통하는 논리인 셈이다. 그러나 인류 중에서 살아남은 우리 사피엔스는 플라톤의 우려와 달리 “돌에 정보를 새기는 능력” 덕분에 사회를 이루고 이렇게 지구 환경 자체를 변화시키는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다. 문자가 없었다면 우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 문자야말로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묘사한
‘2016년 3월,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바둑프로그램인 ‘알파고(AlphaGo)’가 한국의 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 대국을 벌이는 것은 사실 지엽적인 이벤트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세돌 9단이 연이어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에게 고배를 마시자 오히려 관심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사이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기술에 대해 우려와 근심을 표하기도 했다. 우리는 알파고 이후로 과학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구체적이고 전방위적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채게 된 것일지
‘재앙의 일상화’, ‘국가재난시대’와 같은 문구가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지금, 아도르노의 발언이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그의 자조 섞인 이 말은 재앙(shoah) 이후 예술의 부활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지적한다. 이로써 재앙 이후 반복되는 악몽에 시달리며 예술 작업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하는 물음이 떠돈다. 『역사의 형상들』은 아도르노의 절규에 대한 랑시에르의 긴 답변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형상들』에서 랑시에르는 먼저 ‘가시적인 것’과 ‘비
지난 여름, 연극계에서 가장 뜨거웠던 화두는 ‘감시’일 것이다. 연극창작 국가지원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업진행주체인 문화예술위원회 소속 공무원이 정치 풍자적 내용의 연극을 공연했던 단체의 연출가에게 사업지원 철회를 요구했다는 사건과, 세월호 사건을 연상시키는 내용의 공연을 국가기관 소속인이 방해했던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일련의 사건들이 갖는 시대착오적 속성을 잠시 차치해두고서, 그것들을 ‘국가에 의해 억압된 예술적 표현의 자유’라는 너무나 익숙한 수사로 일괄해 버린다면, 그것은 너무나 간단한 독해에 머무
8월 12일 금요일, 다향관 세미나실에서 란 주제의 학술회의가 동악어문학회의 후원에 힘입어 전례 없는 규모로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근대의 테크놀로지가 예술체제(regimes of art)의 요인이 되고 문학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에 관여하는 양상을 여러 가지 방면에서 심도 있게 다루었다. 학술회의를 기획한 동명의 연구팀은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과 갱신을 헤아리는 데 긴요한, 그것의 역사적ㆍ문화적 계기로 연동될 만한 각종 테크놀로지의 이론적 정립을 강조했다. 그에 따라 기술된 성과들,
‘혐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혐오 발언, 혐오 범죄 등의 문제는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20년 전에 출간된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의 저서『혐오 발언(원제: Excitable Speech)』은 한국 사회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까? 그녀는『혐오 발언』에서 인종차별 발언, 포르노그래피, 흑인 갱스터 랩 음악, 동성애자의 자기 선언, 십자가 소각, 국가 검열 문제 등 다양한 형태의 ‘상처를 주는 말’을 다룬다. 그 전에 잠깐 배경이 된 맥락을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미국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