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밭 - 이 우 성아이들이 몸에 묻은 슬픔을 털어냅니다아이들은 밭에 슬픔을 묻습니다아이들은 종일 밭에 있습니다 슬픔을 묻고 다시 묻고 그래도 슬픔이 너무 많아서 아이들은 어떻게 밭에 왔는지 모릅니다아이들은 밭이 뭔지 모르고아이들은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밭에서 슬픔이 자랍니다슬픔이 다시 아이들의 몸에 붙습니다 아이들은 계속 슬픔을 묻습니다슬픔은 슬픔과 엉키고 슬픔은 감정도 없이 울창하고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앉아서 아이들이 슬픔에 묻히는 걸 봅니다 아이가 슬픔이 너무 많이 묻은 아이를 묻습니다아이가 들어가고 아이가 묻
인터넷과 SNS를 떠돌던 ‘개저씨’란 단어는 얼마 전 방송된 SBS 스페셜을 통해 공중에 전파되었다. 방송은 ‘개저씨’를 기성세대와 그 아랫세대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고찰했다. 이 단어는 주로 아랫세대들이 권력을 가진 중장년층 남성들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권위주의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일명 ‘꼰대’라고 불리는 20-30대 남성들에게도 이 표현은 적용된다. 다듬어서 말한다면 한국사회에서 남성이라는 권력과 나이라는 권력으로 성차별적인 발언과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자신의 가부장적 가치관을 심하게 강요하는 개념 없는 사람이라면
“죽은 땅에서 라일락이 피어나고, 추억과 욕망이 뒤섞이고, 봄비가 마른 뿌리를 깨우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과 이해할 수 없는 현대사회에 대한 절망은 4월을 겨냥한다. T.S.엘리엇이 「황무지」(1922)의 첫 행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읊조리며 시작한 것은 4월의 봄날이 잔인할 정도로 찬란했기 때문이리라.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에 찾아온 라일락 피는 봄날은 처참한 현실을 기만하는 것으로 보였으리라. 생동감의 천진스러움에서 느꼈을 그 당혹감, 그 잔인함. 2014년 이후 우리
소설을 쓰는 자로 꿈이 있다면 죽기 전에 끝내주는 연애소설을 한편 써보는 것이다. 누구를 사랑하는 것, 누구에게 사랑 받는 것, 누군가와 함께 사랑하는 것, 혼자 사랑하는 것, 몰래 사랑하는 것, 위험하게 사랑하는 것. ‘사랑을 하는 경험’은 누구나 겪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건이지만 ‘사랑을 하는 그 경험’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가장 사적이고 특수한 사건이기도 하다. 때문에 연애소설은 소설의 세계에서 가장 닳고 닳은 그렇고 그런 소재이지만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 중 가장 강력하고 호소력 짙은 영원한 소재이기도 하
우리는 청춘이다.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너무나도 손쉽게 ‘청춘’이라고 규정지어 버린다. 하지만 당사자인 우리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이런 모습을 청춘이라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에 빠지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그렇다면 ‘청춘’이라는 단어가 주는 상대적 박탈감과 괴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작년 신드롬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가 있다. 바로 tvN에서 방영된 웹툰을 소재로 한 드라마 〈미생〉이다. 이 드라마는 ‘장그래’라는 프로바둑 기사를 준비하던 청년이 한 회사에 계약직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되는
이름의 돌 - 주 원 익포도주 머금은 돌자수정처럼 굴러 박혀들어온이름은 아름다움을 응용한다용융, 돌의 혈관 속으로 녹아내리는빛의 결정 도래 없는 미래는 태고의암반과 밀어에 다다르고매장된 말들에서 밀려나오는 암석들수정 이데아의 살갗이 벌어지고대지의 혈액은 녹아내린다 굳어가는 어둠과 지상의 광물들누군가의 동공 너머로 녹아버릴피와 살, 시선을 머금은 돌 1980년생. 2007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으로 『있음으로』가 있음.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세계를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진행되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전시가 마무리되어 가는 시기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찾아 인산인해를 이뤘다. 지난 1999년 사망한 스탠리 큐브릭은 20세기를 빛낸 위대한 미국 감독 중 하나이다. 그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같은 풍자극에서부터, SF, 전쟁,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고, 〈시계태엽오렌지〉와 같은 문제적 작품까지 선보였다. 하지만 이런 폭넓은 그의 영화 편력이 그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양한 장르 속에서
어쩌다보니 남극에서 두 번의 여름을 보내고 왔습니다. 과학자들과 함께요. 남극이라니. 달만큼이나 아득한 곳이죠. 남극에 다녀왔다 하면 사람들이 물어요. 거기 얼마나 추워? 펭귄 봤어? 빙하는? 그래서 어땠어? 보통은 이 순서입니다. 물론 춥습니다. 여름이어도 남극은 남극이니까. 펭귄과 빙하는 수도 없이 봤구요. 그래서 어땠냐면, 글쎄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러니까 그걸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내가 우주의 한 존재라는 걸 느꼈다고나 할까,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뜬 구름 잡는 얘기, 식상한 은유 같지요. 그런데 이렇게 한 문
얼마 전 영화 마션을 봤다. 마션은 화성에 홀로 떨어진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가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유머러스하면서 긴장감 있게 그리고 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지구에서 약 7800만 킬로미터 떨어진 화성에 혼자 있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힌다. 하지만 주인공은 자신의 생존을 알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총 동원에 신호를 보낸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문득 2015년을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보여서 마음이 아팠다. 화성 탐사를 지켜보는 시대에서 부단히 아날로그적이고 투박한 대자보가 다시 주목 받
말라가는 풀을 만진다. 죽음은 도처에 있다. 어둡고 황량한 거리가 펼쳐진다. 잃어버린 기억을 옮긴 것입니다. 소박하고 찬 공기를 흘려보낸다. 살아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보십시오. 지나온 목소리가 어제의 풍경으로 기록된다. 흘려듣지 않고 새겨듣기로 합니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하나의 계절이 끝나가고 있다. 녹색의 풀이 갈색으로 말라가고 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많은 것들에 뒤덮여 살아 왔다. 밤색과 자주색 나무의 색이 계절의 색을 대신한다. 비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지나간 일을
‘문학 권력’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적어도 최근 10년간 올해만큼 빈번하게 쓰인 해는 없을 것이다. 신경숙 소설의 표절 시비 이후, SNS, 공중파 뉴스 등에서 문학 권력이라는 말은 그 용어에 대한 진득한 논의를 건너뛴 채 발설되어 왔다. 그리고 그 여파로 『문학동네』에 이어 『창작과비평』의 주요 편집위원들이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문제는 곧바로 ‘문학 권력의 해체인가 교체인가’로 이어졌다. 마침 등장한 신생 문예지 『악스트Axt』와 『애널리얼리즘Analrealism』은 이러한 의문을 증폭시켰다. 먼저 『악스트』를 살펴보자. 소위 ‘
이미 수차례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매번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고등학교 2학년 초여름에 떠나온 옛집의 다락방은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었다. 두 여동생들과 떨어져 잠시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곳, 얼른 잠 안 자고 뭐하냐는 부모의 성화도 피해갈 수 있는 곳. 밤이면 창 너머로 반짝이는 먼 곳의 불빛을 바라보다 잠들곤 했다. 다락 아래는 부엌이어서 새벽이면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가 꿈속으로 끼어들었다. 아버지는 출판사의 영업부 직원이었다. ‘찌라시’로 불리던 팸플릿을 서류 가방에 넣어 가가호호 방문해 책을 팔았다. 아버지가 이직한
“좋은 연구자가 되지 못하면 너는 괴물이 되고 만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잔혹한 동화 속에 들어선 대학원생이라면 ‘좋은 연구자’란 무엇일까, ‘나’는 과연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를 곰곰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쩐지 나는 연구자답지 못하다거나, 역시 나는 연구자가 될 만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와 열패감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퍽 “외로운 길”임에 분명할 것이다. 는 그 “외로운 길” 위에 선 연구자들이 “우리가 서 있는 여기는 어디일까”
家具들이비스듬했다 모두가조금씩 미끄러지다가 멈춘表情 어쩌다가손에는 신발을 쥐고 이마 그늘이 맨발등에 수북이 앉고질그릇이 하나 한켠에놓인 오후노래 소리 지나가듯窓邊, 마르는 가을날의 꽃들 꽃이파리들헛기침 두엇 건네는 수밖에어둑함 속으로 질그릇 하나 오래 스미고 있는 눈이 젖는 노릇이여 1965년생. 1987년 『경향신문』으로 데뷔.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뺨에 서쪽을 빛내다』,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등이 있음.
주거지는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성향을 투영하거나, 역으로 거주민의 기질이 주거지의 색채로 덧입는다. 어떤 동네에 대한 품평은 그 안에 사는 거주자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한 동네의 명운이 하루밤새 극적으로 바뀌었다면 창작의 소재가 될 만하다. 정부의 토건 정책 때문에 일순간 땅값이 수천 배까지 폭등한 양재역 사거리 일대(말죽거리)가 소설과 영화의 소재로 불려나온 걸 보라. 어느 동네라고 고유한 드라마가 없겠는가만, 관악구 신림동은 고단한 이들의 흥망성쇠가 밴 동네다. (서울역사박물관 2015.9.11
엊그제 사람들을 만나 밥을 먹으며 말했다. 일주일 만에 사람이랑 같이 밥을 먹는다고. 내 말을 듣고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서, 일주일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지냈다고 설명했다. 일부러 사람을 피한 거냐고 묻기에, 그런 건 아니고 내 생활이 원래 그렇다고 대답했다. 약속이 없다면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아무도 만나지 않을 수 있고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흔한 나날들. 대학 시절에도 많은 날을 혼자 보냈다. 정말 필요한 순간 외에
최근 들어 ‘먹방(먹는방송)’, ‘쿡(cook)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물론 과거에도 요리프로는 있었다. 그러나 그 분위기나 포맷, 진행자와 시청자 연령대 등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있다. 과거 요리프로는 가족들의 식단을 책임지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전문가가 조리법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반면 최근에는 시청 연령층이 광범위하게 넓어졌고, 진행자가 정식 자격증을 가진 요리사가 아닌 경우도 많다. 그나마 현재 요리 프로그램 중에 올드버전에 가까운 것은 정도인데
나의 발화는 나를 몰라라 어디선가 마른 꽃잎이 불씨를 튕기고나의 검은 역사는 두 번 다시 나를 부정하라 어느 샌가 나를 벗은 무지의 혀끝은 나를 핥고 너로 물들어라 얼룩을 넓히며 얼룩지는 미지가 될 때까지펄펄 내 들끓는 방향들의 꼭짓점에너에 가까워진다 나는너에 도달한다 나는너에 미친다 나는 나침반의 피로한 경련이다불안의 옆구리에 박힌 부러진 열쇠날 구릿빛 도시의 나날을정오의 수형으로 자라나 닫히지도열리지도 않는 생활의환원의 닳아빠진 문턱과 입술들을 그러나 나는 우리를 넘치지 못한다 그러나배꼽을 공유하는 것들그림자 사슬로 엮인 것들
미술 분야에서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단 하나의 행사 ‘거장 이쾌대-해방의 대서사’ 전람회는 2015년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그 언제던가, 월북작가 해금조치가 있고서 얼마 뒤인 1990년 해금작가의 한 사람으로 ‘이쾌대’ 전람회가 열렸다. 놀라웠다. 1948년에 그린 네 폭의 대작 연작은 20세기 한국 미술사상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해방공간에서 한국전쟁까지의 미술사는 공백이나 다름없는 시기였다. 그런데 군상이 등장해 버리자 공백은 순식간에 메꿔졌고 우리는 미술사를 다시 쓸 수밖에 없는 숨 막히는 긴장감에 사로잡혀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트위터를 하는 사람과 페이스북을 하는 사람. 물론 일반론이다. 개냐 고양이냐, 물냉이냐 비냉이냐, 메이웨더냐 파퀴아오냐, 건축이냐 혁명이냐 같은 수많은 이분법 중 하나일 뿐이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개-물냉-파퀴아오-혁명-트위터 쪽의 사람이다. 트위터에는 2010년 4월에 가입했다. 트위터에서 나는 노래를 부른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입으로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손으로는 가사를 타이핑한다. 루저 외톨이 센 척하는 겁쟁이 못된 양아치… 그러면 누군가 내게 멘션을 보낸다. 루저 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