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소개할 책은 엄밀히 말해 신간이라 할 수 없다. 혹자는 또한 이 책을 고전(古典)이라는 수식어로 소개하는 취지에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겠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이하 『딴스홀』)는 미술사학자이자 목수를 겸하는 소설가이자 걸출한 에세이스트로 그간 문화계와 학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김진송의 1999년 저작이다. 근 이십 년만에 판형과 부분적인 오류를 수정한 제2판본이 나왔다. 1999년 출간되어 이제야 2판을 찍은 책을 무람없이 고전이라 칭하는 게 일견 어색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일 년에 고작 네 권만이 선택
일상이 잠식되고 있다. 2020년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WHO)는 뒤늦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코로나19)에 대해 팬데믹을 선언했다. 1968년 홍콩독감과 2009년 신종플루에 이어 사상 세 번째다. 매일 뉴스를 보기 전에 깊게 심호흡을 해야 한다. 설마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감염병은 인류 역사와 함께 존재해 왔다. 로마제국 멸망과 중세사회 해체는 페스트로 인한 인구 감소가 원인이었고,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은 아메리카인에게 치명적인 매독 같은 질병을 전파했다. 가깝게는 1918년 스페인독감으로 5천만~1억 명이 사망
숙명여자대학교의 20학번 새내기 중 한 명이 입학 반대 운동과 색출 시도에 부딪혀 입학을 포기했다. 입학 반대와 색출의 근거는 트랜스 여성인 그가 ‘여성을 사칭하는 남성’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렇게 한 학생을 대상으로 혐오 표현을 비롯한 집단 가해가 벌어졌다. “트랜스 여성을 여성으로 인정할 수 없다”라는 주장에는 여성을 사칭하면 이득을 얻는다는 전제가 있다. 주로 여성 전용 공간 이용이 그 이득으로 거론되는데, 사칭의 이익이라는 논리는 우선 비장애인이 ‘역차별’당한다는 주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만성질환과 함께 살아가는 페미니
대다수의 현대인들에게 복도는 그다지 의미 있는 공간으로 인식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우리는 복도라는 공간에 삶의 많은 부분을 의탁하며 생활한다. 거주지의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큐브(cube) 형태의 반듯한 현대인들의 사적 세계는 필연적으로 복도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복도는 사적세계와 공적세계의 구획을 생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사각지대이다. 로저 루커스트의 『복도: 모더니티의 통로』는 기존의 공간 기호학에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바 없던 사각지대인 복도를 모더니티의 핵심공간으로 주목하는 흥미로운
포크너 작품은 젠더의 대비가 뚜렷하다. 남성들은 주로 성적 불능자이거나 정신이 메마른 자로 등장하는 반면, 여성들은 금기를 무너뜨리고 욕망을 추구하는 리비도(Libido)의 화신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까닭에 페미니즘 비평이 포크너 작품을 균형 있게 분석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중요시됐다. 그러나 페미니즘 비평은 포크너의 여성상을 주로 혐오와 숭배의 이원론적 관점으로 연구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김기현의 논문 「포크너 작품의 여성 주체성에 관한 연구 : 탈코드적 주체성에서 횡단적 주체성으로」는 페미니즘 비평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들뢰즈
질병은 자연현상이지만 사회적 요인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질병의 발생과 대응 및 치료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사회적 요인들은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며 질병의 최종 결과는 다시 사회에 영향을 주게 된다. 즉 질병과 사회는 발생부터 유행, 소멸 단계는 물론 소멸 이후까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코로나 유행병을 포함한 대부분의 질병은 사회적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질병의 발생 단계를 살펴보자. 질병이 발생하는데 있어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의 특성이 주된 원인임에는 분명하다. 예컨대 현재 유행하는 코로나 바이
이천십 년대 하반기 가장 활발하고 열띤 사회적인 도전을 감행하는 중인 학문 분야가 페미니즘이라는 걸 부정할 이는 없을 터이다. 사회변혁을 구상(vision)하는 수많은 급진이론들이 대학원과 사설 아카데미 심지어 유튜브를 통한 ‘교양교육’으로 힘이 빠져 암중모색하는 와중에, 페미니즘은 운동이자 이론으로서 가장 생산적이고 정치적인 학제로서 오늘날 한국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이는 한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하비 웨인스타인의 권력형 성범죄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반(反)인종, 반여성주의적 발언들에 미국의 많은 대중이 분노하는
버지니아 울프는 에세이 『3 기니』(1938)에서 전쟁 방지를 위한 활동에 재정적 지원을 호소하는 편지에 답하는 가운데, 역사가 증명하듯 남성들은 “조국을 수호하고자 싸운다”고 말해왔지만, “아웃사이더인 나에게 ‘우리 조국’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자문하며 “여성으로서 나에게 조국은 없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조국은 나를 노예처럼 취급하였고, 교육과 재산에 대한 어떠한 몫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울프는 전쟁, 파시즘, 제국주의에서 드러나는 호전성, 소유욕, 탐욕 등이 여성억압적인 가부장제와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았고, 이
뮤지컬은 공연장이라는 물리적 공간 내에서 연출자가 의도한 ‘배치’를 통해 무대장치와 배우를 공간 안에 구성하는 예술이다. 그 외에도 비평가, 관객 등 다양한 구성원들 간 ‘관계의 배치’를 통해 공연장은 뮤지컬 산업이라는 상징적 공간으로 발전한다. 관계의 배치는 힘의 주체와 크기, 그리고 방향에 따라 구성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권력이 생성, 개입되며 변화한다. 김수영의 논문「국내 뮤지컬 문화권력의 생성과 분화」는 문화자본의 불평등성과 문화적 독점구조를 분석하는 부르디외의 이론적 모델을 차용하여 뮤지컬 산업의 구성원들 간
강연을 하다 보면 마지막에 자주 접하는 질문이 있다. “강연을 듣고 더 많이 알고 싶어졌는데,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강연의 주제에 따라서는 특정한 책을 소개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이렇게 나는 대답한다. “아무 책이나 읽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두루두루 많이 읽으시면 좋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취향과 고민에 어울리는 책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그 책을 꾸준하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내 자신을 돌아봐도 그랬던 것 같다. 책을 펼쳤다가 끝을 보지 못한 책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마침내 나를 사로잡은 소수의 책
한국에서 촛불집회의 역사는 제법 오래되었다. 언론에 기록으로 남은 것 중 가장 오래된 촛불집회는 1974년 9월 26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명동성당에서 주최한 기도회 겸 집회다. 당시 천주교 사제들과 신도들은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올린 뒤 가두행진을 하며 민주헌정의 회복과 긴급조치 무효화를 주장했다. 대부분의 천주교 성당에서 성모상과 봉헌초는 함께 배치되어 있는데, 성모 마리아께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해줄 것을 바라며 신자 개개인의 간절한 소망과 염원을 담아 촛불과 함께 봉헌하기 위함이다. 수많은 시민들이 국가폭력에 의해 고통받던
아름다움은 주관적인가 아니면 객관적인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미는 주관적이다. 그러기에 “내가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는데 누가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그저 자기가 좋아하고 즐기면 그뿐이지 무슨 말이 필요한가” 등과 같은 다소 냉소적인 말에 대해 반박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과연 미가 주관적이기만 할까? 그렇다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다. 당신은 아름다움을 욕망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아름다움을 모른다면, 어떻게 아름다움을 욕망할 수 있겠는가? 플라톤은 현상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
‘고전’이라는 말을 ‘페미니즘’ 속으로 들여온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전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고전이라는 반열 속에 여성 저자의 글이 들어가 있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일 정도로 ‘고전’은 여성의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 동안 여성들은 문자에 접근할 수 없었으며, 학문과 지식의 세계는 오직 남성의 목소리로만 이루어져 왔었다. 여성이 문자를 사용하고, 여성이 주체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갖게 되고, 또 여성의 이름으로 책이 출판되는 것 자체가 근대에 이르러서야, 그것도 상당한 투쟁을 거치고 난 이후에야 이루어진 일이다.
서구과학의 모토인 합리적 이성의 정신은 유럽을 넘어 전 세계를 근대로 재조직했다. 합리적 이성에서 발현한 근대정신은 일견 인간사회의 거의 모든 부분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 듯 보이지만 양적 존재로서 대중(mass)을 정복하는데 이르진 못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론에서부터 기원하는 대중사회에 대한 근대지식인의 공포에서부터 대중동원을 통한 사회혁명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이성은 자신의 방식대로 대중이라는 문제적인 존재를 끊임없이 진단하고 동원해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게 드러났다. 대중은 이성과 지
새롭고 낯선 곳에 대한 관심은 인간을 여행하게 만든다. 공간을 이동하며 마주하는 생경한 풍경은 자신이 떠나온 세계를 재인식하게 만들고, 여행이라는 비일상의 시간은 사유를 확대하고 지적 발견을 가능하게 한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지리학의 발전과 도로, 기차 등 교통 시설의 발달은 인간을 보다 먼 곳으로 떠날 수 있게 했으며 이를 통해 경계와 공간에 대한 인식 역시 확장되었다. 국가의 형성과 제국주의 팽창 속에서 여행은 세계적 정세와 조선의 위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흐름과 함께 여행은 문학의 주요 소재로 들어오게
세계영화사 책들을 볼 때마다 궁금했던 것이 있다. 한국영화사 파트는 왜 이렇게 하나 같이 짧을까. 1,000페이지가 넘는 긴 분량을 자랑하는 유명한 세계영화사 책조차 한국의 영화사를 기술한 부분은 몇 줄을 채 넘지 못한다. 실제로 한국영화사에 대해 그렇게 할 말이 없는 걸까. 이렇다 할 업적이나 영화사에 영향을 미칠 사건이 없었나. 당연히 아니다. 영화사라는 건 애초에 선별과 배제에 따른 분류 작업이다. 한 두 권의 책 안에 방대한 역사를 모두 담는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건 대략적인 흐름과 인식이다
지금까지 수동적인 문화 향유자였던 대중들은 첨단기술의 발달로 콘텐츠를 직접 창조하고 유행을 선도하는 문화 향유자로 탈바꿈됐다. 기술과 문화의 조우는 대중들이 문화콘텐츠를 풍성하게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문화 발전의 결과물이 향하고 있는 곳이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는 점이다. 특히 ‘복고 현상’이라는 문화적 흐름은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상품화되고 있으며, 전반적인 문화콘텐츠 분야에 있어서도 새로운 현상들을 일으키고 있다. 노창현의 논문 「대중음악 복고 현상에서 문화 기억의 작동방식 연구」는 복고현상의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 특히 소설의 양상은 이전시대와는 많이 달라졌다. 작가와 독자 양자가 기대고 했던 문화적 토대자체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87년 민주화와 뒤이은 공산진영의 해체는 1980년대까지 공고하던 ‘운동(movement)으로서의 한국문학’을 근본부터 뒤흔들었다. 그 와중에 새로운 세대는 디지털 신(新) 테크놀로지와 고도성장의 열매인 각종 소비문화적 소양을 전면에 내세운 ‘신세대문학’을 선보였다. 기존의 문학인들에겐 아찔하게 보였을 상황이었겠지만 이러한 경향은 ‘현대문학’ 발전과정의 필
영화 (2012)에서 로렌스는 애인 프레드에게 자신이 실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임을 고백한다. 프레드는 충격에 빠진다. 이원 젠더 체계에서 한 인간은 ‘여자 혹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 평생 그에 상응하는 젠더 정체성을 갖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에게, 남성은 여성에게 성적(이거나 로맨틱한) 끌림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통상 상대방의 정체성을 묻지 않은 채 사랑을 고백하고 연애에 돌입한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얼굴, 체형, 목소리, 행동, 외모를 꾸미는 방식 등을
1. 미메시스는 무엇인가. 그 어원은 그리스어인 mimeisthai 이고 명사형이 mimesis 이다. 미메시스는 ‘모방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모방하는가. 어떻게 모방하는가. 혹은 왜 모방하는가. 이런 물음이 제기된다. 첫째, 모방의 일차 목적은 자연과 관계된다. 인간이 자연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모방한다. 생존의 확률은 인간이 자연과 더 많이 닮아갈수록, 더 많이 자연의 힘을 파악할수록 높아진다. 둘째, 인류가 진화하면서 발생하게 된 국가와 사회, 혹은 문명이라는 제2의 자연은 더 복잡한 미메시스 능력을 요구한다.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