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일 때, 우연히 1970년대 석사학위 논문을 몇 편 본 적이 있었다. 왜 그런 ‘옛날’ 논문을 보게 되었고 그 논문들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물론 잊어버렸지만, 그때 받은 인상은 의외로 지금도 남아 있다. 물론 여러 인상과 느낌이 들었는데, 무엇보다도 참고문헌의 간소한 양이 여태 지워지지 않고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때는 “이건 뭐지! 겨우 이 정도?”하는 느낌마저 들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너무 쉽사리 판단하고 우쭐해 한 듯하지만! 어쨌든, 그러한 반응은 당시나 지금의 학위논문을 살펴보면 쉽사리 이해 가능하다.
2019년 3월, 석사과정 마지막 학기가 시작됐다. 애초에 박사에 뜻이 없었던 나는 석사 학위를 따고 취직할지, 아니면 수료만 하고 취직할지 결정해야 했다. 교수님과 동료들은 학위를 따고 취직하라고 조언했다. 학위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나으니까. 취직에 실패하면 다시 학교로 돌아와 박사과정을 밟으면 되니까. 나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금전적인 문제가 가장 컸다. 나는 당시 대학원을 다니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와 조교 장학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인해 등록금 환불문제가 계속해서 불거지고 있다. 전국 27개 대학 총학생회 연대단체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는 지난 4월 14일부터 19일까지 각 대학 총학생회와 전대넷 SNS에서 상반기 등록금 반환에 대한 설문을 진행했다. 국내 203개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 2만 1,784명을 대상으로 설문이 진행됐으며, 그 결과 응답자의 99.2%가 ‘상반기 등록금 반환이 필요하다’라고 답했다. 등록금 반환의 이유로는 ‘비대면수업의 낮은 질’이 82%를 차지했고 실험·실습 불가, 학교 시설이용 불가 등 여러 불편사항이 제기됐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현재와 같은 삶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전염병의 습격으로 달라진 전 세계적 풍경 속에 나의 삶 역시 많은 부분 변화가 있었다. 주로 낮에는 강의와 연구를 밤에는 극장을 찾는 일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나는,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된 강의와 줄줄이 취소된 공연들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에 충실히 동참하며 무척 단조로워진 일상을 보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러한 삶의 변화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 낮에는 온라인 강의를 소화하고 밤이면
21대 총선은 ‘3연승’과 ‘3연패’의 맞대결이다. 한국 정치에 없었던 4연승과 4연패의 총선 결과가 주목되는 이유다. ‘3연승’과 ‘3연패’는 10년 사이로 반복되는데 ‘2006 지방선거-2007년 대선-2008년 총선’과 ‘2016년 총선-2017년 대선-2018년 지방선거’다. 총선 승부의 절반은 공천에서 갈린다. 희생과 헌신의 통합 그리고 공동체 우선의 자세가 되어 있는지 국민이 판단한다. 총선 1라운드 공천 승부는 여당의 근소 우세. 특히 ‘문 세습, 김 투기 그리고 정 미투’의 공천 고비를 잘 넘겼다. 물론 권력의 오만과
코로나19 예방 조치의 바깥으로 밀려나는 대학원생들이 있다. 이들은 대학들이 코로나19 집단 감염을 막기 위해 개강 연기, 원격 수업 등 다양한 조처를 취하고 있음에도 업무, 실험 등으로 인해 등교를 암묵적으로 강요받는다. 특히 문제인 것은 교수 권위로 인해 눈치를 보면서 등교하는 일부 대학원생들이다. 건강보다 중요한 업무가 있는가? 여기서 건강이란 개인의 신체 건강뿐만 아니라 사회의 신체 건강을 포괄한다. 코로나19가 위험한 것은 대처가 까다로운 신종 바이러스인 동시에 매우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전염
고등학교 시절부터 인연을 이어온 학원 강사가 대학원 진학을 앞둔 나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가 아직도 또렷이 생각난다. 가장 좋아하는 일은 절대 직업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 가치에 상응하는 다른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대가는 좋아하던 것을 더 이상 좋아할 수 없게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것이 궁극적인 삶의 행복이라 믿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무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매료된 후 줄곧 연극을 업으로 삼으리라 다짐했던 나도
지난 8월,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은 인문·사회계열 강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간강사 연구지원사업’을 발표했다. 8월 1일부로 발효된 개정 강사법으로 인해 강의를 잃은 시간강사들을 지원한다는 명목이었다. ‘총 2,000개의 과제를 선정’하며 ‘선정자에게는 1년 간 1,300만 원(간접비 제외)의 연구비가 지원된다’는 조건 자체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문제는 이 사업의 지원 자격이 ‘박사학위 소지자’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개정 강사법 시행으로 인한 강사 대량해고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사업이라기엔 너무나도 안일하고 비상식적으로 준
배움과 가르침에는 위아래가 없다. 대학 역시 위아래 없이 수많은 의견이 교류하는 논의, 논쟁의 장이다. 이러한 논의와 논쟁의 과정을 통해 나오는 지식이 새롭고 독창적이라 말할 수 있는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격언이 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것이 없다는 단언이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발견, 발명해나가는 고단한 과정을 함축한 이야기일 것이다.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 대학원생 등 많은 이들이 이러한 고단함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겪는다. 고단함의 결과물 중 하나가 논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문자로 증명해내야 하는 논문 쓰기 과정은
대학원에 대한 첫인상을 떠올려 본다. 그것은 설렘도, 어떤 다짐도 아닌 ‘7,949,000’이란 숫자였다. 학부를 갓 졸업한 내가 거의 800만 원에 육박하는 전문대학원 등록금을 낼 방법은 학자금 대출밖에 없었다. 학자금 대출을 신청하기 위해 들어간 장학재단의 홈페이지, ‘제때 돈을 갚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될 수 있음’을 거듭 강조하는 동영상과 온라인 안내서를 보며 말할 수 없는 부담감을 느꼈다. 4학기 중 1학기 등록금을 2022년 7월이 되어서나 다 갚을 수 있다니. 아니, 그 안에 갚아야 한다니. 만약 4학기를 다 대출로 다
태풍이 지나가는 주말, 빈 연구실에 홀로 앉아 동국대학원신문의 첫 마감을 한다. 석사 두 번째 학기를 시작하며 동국대학원 신문사에 들어오게 되었다. 대학원에 들어가면 신문사에서 일해야겠다고 학부 때부터 마음먹었다. 먼저 진학한 선배가 신문사에서 일한다고 들었고, 글을 쓸 수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신문사 일을 하고 싶었다. 지난 학기, 신문을 꼼꼼히 읽으며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상상했다. 기사를 쓰기 위해 낯선 분야의 연구를 조사하며 무지함을 체감하고, 선배의 아주 긴 졸업 논문을 읽으며 아득하다고 생각하는
문학이 더 이상 시대의 중심이나 사회변화를 주도하는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은 그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식상할 정도로 자명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현상의 이유를 매체 환경의 변화에서 찾는 것 또한 식상한 말이긴 마찬가지다. 최근 유튜브 인구의 폭발적 증가는 문학의 하향세가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되어버렸음을 입증하는 현상인 듯도 하다. 그러나 문학의 이러한 위상변화는 역으로 문학이 지닌 또 다른 역량과 성찰적 가능성을 열어주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밖으로 뻗어나가는 힘이 사그라들 때 비로소 문학이 자신이 누렸던 힘이
서울소재 모 대학원의 교수가 강의평가를 낮게 준 학생에게 공개면박을 줬다는 사실이 지난 8월 한겨레신문을 통해 보도됐다.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A교수는 수업시간 내내 해당 학생을 추궁했고, 언쟁 끝에 학생 스스로 수강을 포기하려는 상황에 다다랐다. 또 모 예술대학 교수가 부정적 강의평가를 쓴 학생을 색출하고, 학생에게 금품을 주며 동료교수를 모함하게 했다는 사실이 지난 8월 15일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위의 사건들은 강의평가에 대한 재고(再考)를 요구하게끔 한다. 강의평가는 강의의 질적 향상과 교수의 교육업적평가를 위해 존재한다.
‘연구의 효용’ 이라는 말은 연구 결과물이 반드시 돈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단순한 의미는 아니다. 물론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그 과정 속에는 돈으로 정확히 환산할 수 없는 수많은 시간과 노동이 들어가며 그것이 책의 형태로든 혹은 직업의 형태로든 연구자에게 대가를 가져다 줄 수 있다면 잘된 일이다. 하지만 이 지면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연구의 효용이란 실질적으로 연구자가 선택한 연구 주제나 연구 질문이 과연 어떠한 현실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에 닿아있다. ‘과연 연구 결과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