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캠코더로 무언가를 찍는 진무의 모습을 비추며 시작된다. 그는 무엇을 찍는 걸까? 진무는 뇌수술을 받게 되면 기억을 잃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억할 것들을 캠코더에 하나씩 담는 중이다. 진무는 고민한다. 무엇을 캠코더에 담아야 할까? 기억해야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진무는 캠코더를 통해 과거를 욕망한다. 그러나 이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다. 이미지가 지닌 운동성 때문이다. 이미지는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흔들리며 고정되지 않는다. 결국 캠코더에 담긴 기억은 그 순간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할 뿐이다.
나의 별명은 ‘늪이 된 사진가’이다. 학창 시절과 고등학교 교사 생활 모두 부산에 있었지만, 마음은 지금 살고 있는 우포가 고향이고 집이다. 교직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프로 사진가의 길을 결심하며 무작정 우포로 왔다. 이곳의 사계절을 카메라에 담으며 지낸 지 어느새 20년이다. 누구나 우연의 형태로 운명과 조우하는데, 사진가가 된 것도, 늪이 된 사진가가 된 것도 이제 와 생각하니 운명이다. 학창 시절 친구를 따라 카메라를 메고 찾았던 우포가 이렇게 내 삶에 특별한 곳이 되리라고는 당시에 알지 못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카메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각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 우리의 마지막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사랑하는 일을 함께하는 것 너는 나에게 동화를 듣다가 잠에 빠지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잠들면 동화가 꿈으로 펼쳐지고 죽은 영혼은 꿈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너의 곁에서 네가 잠들어 있는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대신 “세계는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거짓말을 할 거야. 그다음 너에게 동화를 들려줄게.”
먼 도시의 영화관이 항상 궁금하다. 여행을 떠나 홀로 밥을 먹는 일이 지겹고, 길 잃는 일에 지칠 때면 지도에서 영화관을 찾아 들어간다. 영화관에는 비슷하게 적적한 사람들이 있었고, 같은 영화를 고른 이들과 잠시 함께 모여 있는 일은 때때로 위로가 됐다. 한 달간의 미국 여행에서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영화관에 들렸다.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은 영화를 위해, 유명 영화관을 구경하기 위해 혹은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매번 각기 다른 이유로 극장으로 향했다. 시애틀에서 들린 영화관은 시애틀국제영화제에서 운영하는 영화관이었다
이 영화의 제목이 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주관적이고 특수한 경험인 연애를 보편화하려는 시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도 자체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사람과 저마다의 연애를 하면서도, 그 연애에 대해 논할 때면 비슷한 지점에서 고개를 끄덕이기 때문이다. 이 끄덕임은 ‘보통의 연애’에 대한 감응이다. 따라서 어딘가에는 분명 ‘가장 보통의 연애’가 존재할 것만 같다. 그렇다면 가장 보통의 연애란 무엇인가? 는 이 물음에 대한 영화적 대답이다. 이 대답은 재훈(김래원)과
위조지폐를 만드는 범죄자와, 이를 진폐와 식별하는 경찰이 있다. 범죄자는 끊임없이 위조지폐를 진폐와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려 노력하고, 경찰 역시 이에 맞춰 위조지폐를 더욱 세심하게 위폐를 골라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서로가 각자의 업무 효율을 향상시키기 위해 습득한 노하우나 기술이 공유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경찰은 더욱 세밀한 부분까지 진폐와 위폐를 구분할 수 있게 될 것이지만, 위조지폐범 역시 경찰이 위폐를 식별하는 요소들을 무력화시키는 더욱 정교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이 끝에
나는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바다를 바라본다 지금껏 죽음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절벽에 서서 바다를 보기로 결심한 사람 그리하여산으로 빠지는 길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 지나친 사람으로서 바다를 바라본다 겁쟁이로 살다가 겁쟁이로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평생 다른 겁쟁이들을 증오한 사람으로서 바다를 바라본다가령 여기까지 오는 길 지갑을 주웠는데 정말 아무도 없었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착하게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으로서 여기까지 도달한 수고와 노력이 아까워 계속 가보기로 결정한 사람으로서바다를 바라본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폭력은 안 돼 살
서울은 아득하다. 한끝에서 다른 끝에 닿는 일은 막막하고, 표정을 삼킨 사람들 곁을 지나는 일은 험난하다. 헤아릴 수도 없는 정거장과 역들이 장소들을 긴밀하게 엮고 있지만, 목적지에서 목적지로 이어지는 일상에서 연결돼 있다는 느낌은 멀다. 변덕스러운 도시 속에서 시간은 무심히 지난다. 자꾸 틈이 벌어진다. 그사이의 기억과 공간이 서울을 지탱한다. 갈라진 틈에 거리예술이 자리한다. 축제라는 비일상은 거리를 공연장으로 만들고, 관객과 배우의 벽을 허문다. 배우는 관객에 대해 묻고, 시민은 무대가 된 거리에 참여한다. 거리예술축제는 익숙
영화는 순간을 포착하고 재현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순간을 재현한 영화 (1990)이 있다. 영화는 1998년 반환을 기점으로 사라질 순간의 홍콩을 담아낸다. 영화는 그 순간을 어떻게 재현하는가? 영화가 주시하는 홍콩은 반환 직전이 아니라 60년대이며, 홍콩을 상징하는 공간은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는 무엇에 집중하는가? 에는 홍콩의 ‘시공간’이 아닌 ‘인물’에 방점이 찍혀 있다. 특히 아비(장국영)라는 캐릭터에 집중돼 있다. 아비는 상처받은 인물의 표상으로 친모에게 버림받고, 양모에게도 제대로
여러 고양이 책의 주요 배경이 되었던 ‘다래나무집’이라는 곳에는 제법 많은 장독 항아리가 있는데, 고양이들이 자주 장독을 독차지하는 바람에 어느 순간 이곳은 ‘냥독대’가 되었다. 고양이들의 자연친화적 캣타워이자 빵굼터(이곳에서 식빵을 굽는 관계로)이고, 놀이터이며 약수터인 냥독대. 녀석들이 냥독대를 즐겨 찾는 첫 번째 이유는 역시 일광욕이다. 고양이들은 주로 봄가을과 초겨울에 장독에 올라가 일광욕을 한다. 햇볕을 받은 장독은 마치 구들장처럼 데워져 온돌의 구실을 한다.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고양이들은 이곳에 올라 몸을 지지고 해바라
1.실제의 횡단보도 앞에 서 있지. 실제의 구청에 가기 위해서다. 실제의 수요일이고 실제의 한낮이다. 나는 이 사람들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평일 한낮의 사람들. 가상의 수요일과 가상의 한낮, 가상의 사람들. 대부분은 일터나 학교에, 테이블에 놓인 탁상시계처럼 째깍거리며 하나같이 째깍거리면서…… 내가 예상치 못한 일로 주민등록 초본을 떼러 가듯이, 예상치 못한 이 자들도 증명하러 가는 길이지. 자신의 째깍거림을 스스로 중단할 수 있음을. 자랑스러운 팔과 다리를 자유자재로 놀릴 수 있음을. 기어코 해내고 맘을. 월요일일지라도. 한
여행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여행이란 ‘내가 있음’에서 ‘내가 없음’으로 나아가 반성의 계기를 제공하는 경험이다. 타국에 도착하면 우리는 문화적, 언어적 차이로 인해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이 일부 소외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는 매우 고독한 것이어서 마치 실연으로 인해 친숙한 세계가 붕괴되는 경험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없음’과 ‘소외’는 삶에 있어서 어떤 반성의 계기를 제공하는가? 관습적 질서의 옷을 벗음으로써 나와 세계의 치부를 보다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사건은 하노이의 바(
의 물성(物性)을 동사로 표현한다면 ‘흐르다’일 것이다. 이 영화는 끊임없이 어딘가로 흐른다. 인물들은 쉼 없이 움직이고, 카메라는 패닝(panning, 수평 찍기)의 움직임을 통해 그들의 삶을 유영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외화면의 소리들은 프레임 안으로 파도치듯 밀려들어온다. 이 같은 영화의 액체적 리듬감은 가 역사와 개인,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하나의 율격이기도 하다. 주인공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는 그러한 영화의 액체성을 체화하고 있는 인물이다. 멕시코의 한 중산층 가정인 소피아(마리나 데
전주국제영화제는 굳이 시간내어서라도 가볼 만한 영화제이다. 여기서 방점은 ‘영화’보다는 ‘전주’에 더 강하게 찍혀있다. 사실 영화제에서 좋은 영화를 만나기는 참 어렵다. 감독과 제목, 시놉시스 정도의 정보만 보고서 감에 의존해 영화를 선택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영화를 많이 보고 싶다는 사람에게는 영화제 참석을 추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꼭 좋은 영화를 봐야겠다고 한다면, ‘단편경쟁’ 섹션을 선택하길 권유한다. 한 자리에서 여러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만큼 좋은 영화를 만날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영화를 보
나는누워 있는 노파의 발을 닦아주었네이곳까지 걸어온노파의 발은 딱딱하고갈라진 뒤꿈치는 노새 같았네나는 이 발이 장식했던 것들을 생각했네크고 물렁한 슬리퍼 이전젊은 당나귀의 발굽처럼또각거리던 구두들과그 소리에 출렁거리며 화답했던 길들을,감탄을 쏟게 만들던 균형있는 둔부와불량스런 휘파람 소리들을간까지 웃어라**는현자의 말처럼췌장 속까지 꽉 메웠던 두근거림을다시는땅 밟을 일 없는 그 발에허공을 잘 딛고 가라제라늄 향료를 뿌려주었네* 장의사**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중에서 인도 현자가 여주인공에게 한 말 1998년 매
비가 온다던 날씨는 따갑게도 화창하다. 큰불이 난 지 3주가 되는 날, 속초. 차를 빌린다. 2년 전 들렀던 아바이마을 식당으로 곧장 향한다. 여전히 밝으신 사장님은 “이번엔 혼자 왔네요”하며, 이곳에서 친구들과 같이 나눈 오랜 대화를 기억해주신다. 화재 소식에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과 마저 반가움을 나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글씨가 조금 더 빽빽해진 벽을 훑는다. 벽에는 사람들이 날짜를 적고, 같이 온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붙여놓고, 그날의 기억 혹은 앞으로의 소망을 남겨 놓는다. 6달 전 한 커플은 두 번째 방문을 기념하며
대학 진학으로 인해 홋카이도에 있는 가족과 작별하고 도쿄행 열차에 몸을 실은 우즈키(마츠 다카코)는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기묘한 이웃집 여자의 행동에 당황하기도 하고, 동기의 속셈으로 취향에 맞지 않은 동아리에 가입하기도 한다. 도쿄의 아름다운 봄날과 스무 살의 시련이 생경하게 맞물리던 어느 날, 우즈키는 대학가 근처의 한 서점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만난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많지만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는 드물다. 이와이 슌지는 첫사랑이 시작되는 그 싱그러운 찰나의 정경을 서술이 아닌 채색의 방식으로
우주가 가라앉은 날. 알 수 없는 자책에 숨도 편히 내뱉지 못하던 나날을 버티다 해가 지고 나서야 차를 몰고 진도로 향했다. 2014년 오월의 밤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따뜻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팽목항. 한없이 무거운 공기들로 가득 찬 항구에서 시선은 쉽사리 바다로 향하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떨궈 먼지뿐인 바닥을 향했다. 서걱서걱한 발걸음 소리가 혹여나 실종자 가족들의 잠을 방해할까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 주변을 서성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동이
너는 몇 층의 눈을 가졌을까 번져 가는 숲과 미소 속에서 울창과 폭로가 뒤엉킨 숲속이었어 노래에도 종과 횡이 있을까 기분을 들킬까 두려워 난간에 올랐지 손바닥이 뜨거운 금속의 냄새로 무성해졌고 포도송이처럼 둥글고 말랑한 방들이었으면 했어 여기는 여전히 중세로구나 덤불과 덩굴의 차이점을 떠올리면 입 속에서 진흙이 끓고 누가 더 오래 말을 아낄지 내기했어 함부로 드나들고 분별없이 휘저어져도 좋았을 텐데 엉성하게 기워 세운 성체의 나무문에 녹슨 못들만 잔뜩 박았지 문지기가 되어 줄 것도 아니었으면서 무늬 없는 옷들이 쉽게 상처입듯이 유년
작년 칸국제영화제는 베니스·토론토국제영화제에 비해 볼거리가 부족했다는 말들이 무성하다.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말하자면 칸영화제가 넷플릭스 영화를 배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넷플릭스 영화를 배제했다는 것은 그들이 이 플랫폼의 작품들을 영화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흥미로운 상황은 한 가지 물음을 야기한다. 지금 여기의, 영화란 무엇인가? 여기서 영화란 개개의 작품보다는 영화 일반 즉, 시네마를 뜻한다. 영화의 정체성을 묻는 일은 과거 발터 벤야민이 밝혔던 것처럼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영화의 정체성을 규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