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학기를 마치고 석박사통합 학기가 시작되었다. 문화콘텐츠·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간 학과. 이 길고 거창한 이름 어딘가에 배움의 자리가 있을까. 문화이론, 미학, 미술사, 영화, 영상콘텐츠, 게임, 도시 기획까지. 인문학을 기반으로 사회·문화적 현상인 무수한 이미지 재현물과 매체를 읽어내는 방식을 습득하는 과정은 길고 막막하기만 하다. 학제를 넘나드는 분야에서 그야말로 ‘쏟아지는’ 텍스트들을 소화해야 하는 압박. 게다가 전공 분야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 역시 병행해야 하는 날들을 겨우 따라가는 동안 다섯 번째 학기가 지나가고 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소위 ‘대장동비리’와 관련된 회사에서 30대 초반의 청년이 6년도 안 되는 기간을 근무하고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았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젊은 사람의 퇴직금이 50억이라는 것은 모든 국민이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회사측에서 산재로 인한 위로금 성격과 문화재 업무를 효과적으로 처리한 대가 등이 포함되어 그 금액이 책정된 것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문화재를 법으로 보호하는 것은 어지간한 틀을 갖춘 국가라면 모두 시행하는 제도이기에 개발행위 과정에서 문화재가 나
지난 주말에는 돼지 막창을 먹었다. 주말 이후로 몇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는지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체질적으로 돼지 고기가 몸에 안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돼지 고기를 계속 먹는 건 맛있기 때문이겠지. 기름진 음식에 알코올 한 잔을 기울이는 것은 내 삶의 재미 중 하나다.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육식주의자다. 그러나 이런 나의 육식 행위가 점점 부끄러워진다. 불과 며칠 전까지 돼지 막창을 맛있게 먹은 내가 이런 글을 쓴다는 것도 부끄럽지만 말이다. 채식을 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명확하다. 동물보호는 물
계획이 어그러졌다. 석사 과정을 수료한 지 반년이 흘렀다. 계획대로라면 석사 마지막 학기에 논문을 완성해야 했다. 쉽지 않다는 걸 깨닫고, 혹은 그렇다고 합리화한 뒤 한 학기 유예했다. 포기하고 취업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선배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 끝까지 써보기로 했다. 변경된 계획안은 상반기에 논문을 통과시키고 하반기에 취업하는 것이었다. 애초 계획보다 1년이 밀려났다. 시간을 더 할애했지만 이번에도 끝을 내지 못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커져가는 취업 압박, 단조로운 일상에 대한 피로감, 부족한 논문 작성 능력 등 변명거리는 많
관계를 면대면의 익숙함으로 배운 나로서는 비대면 수업이 다소 곤혹스럽다. off된 채 이름만 보이는 화면을 날카롭게 응시한다. 요것 봐라! 라면서. 얼굴을 봐야 수업 리듬을 더 잘 찾을 수 있을 듯 싶어, 은근슬쩍 얼굴을 보여주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에게 꽤나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화면을 켜라고 강요하지도, 그걸 포기하지도 못한 애매한 시도다. 어떤 이는 나의 ‘느슨함’에 경고를 주기도 하지만, 아직 나는 모두가 얼굴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그저 소망으로만 남긴다. 여성학전공자로서 디지털 폭력과 유포의 현
갈 곳이 없다. 지난 학기까지는 집을 나서면 대학원 신문사 연구실로 향했다. 가끔 다른 곳으로 새기도 했지만, 주로 연구실에서 책과 논문을 살폈다. 영화를 보는 날도 있었고, 홀로 남은 날이면 음악을 틀고 사위어가는 바깥 풍경을 지켜보기도 했다. 자취해본 적 없는 나에게 연구실은 집 이외에 가장 오래 머문 장소다. 몇 번의 이탈 위기에서 잡아준 것도 다름 아닌 연구실과 그곳의 책상이었다. 학적이 수료로 바뀐 지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았지만, 소속감은 빠르게 희석된다. 나를 소개하며 이름 뒤에 붙일 말을 생각해본다. 대학원생이라 말하
인류는 본래 절반만이 투표권을 소지할 수 있었다. 1776년 미국에서는 독립 선언문이 작성된다. 민주주의적 혁명의 성격을 가진 이 선언문에는 자유, 평등과 인민 주권의 확립을 이루려는 시도가 담겨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1848년, 미국 뉴욕 세네카 폴스에서는 여성 인권 대회가 열린다. 여기서 발표되는 ‘소신 선언’에서는 남성이 여성에게 행하는 16가지의 억압이 담겨 있다. 오래 전 그들의 독립 선언문에는 여성이 없었다는 뜻이다. 미국에서 여성의 참정권은 1920년 8월에서야 인정된다. 프랑스 역시 대혁명
사회라는 개념은 늘 모호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면서도 코로나 같은 사건 앞에서 우리는 사회가 어떻게 달라질까를 궁금해한다. 지금도 어떤 모습인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면서도 앞으로의 모습을 궁금해하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에 관한 많은 담론은 그런 질문과 상상을 담고 있다. 다만 사회를 들여다보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는, 현실의 좌절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여러 지표와 비대면, 온택트, 디지털, 혁신, 뉴노멀 등등 새로운 상상을 자극하는 미래지향적인 말 사이에서 섣불리 코로나 이후를 상상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사회는 결국 관
등록금, 성적, 학업… 이러한 단어들은 현재 내게 가장 가까운 단어다. 언급한 단어들을 제대로 수행해내는 것에도 너무 큰 힘이 들어 이보다 더 큰 단어들은 가깝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가령 ‘세계’같은 단어 말이다. 그러나 나란 존재는 결국 세계에 속해 있을 수밖에 없어서,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무감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세계가 미얀마를 지켜보고 있다. 지난해 총선에서 참패한 미얀마 군부가 선거 결과를 부정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1년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해 권력을 장악한 미얀마 군부는 재선을 치러 민주 세력에 빼앗겼던
내게 배움은 삶을 살아가는 방법론이다.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살아간다는 것의 ‘깊은 뜻’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언제나 공부에 대한 막연한 열정이 있었고, 도서관을 꽉 메운 활자들은 내게 삶의 지혜를 제시해줄 것만 같았다. 어느 날 열정은 벽을 만난 듯했다.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공의 세부적인 지식은 사실상 삶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삶과 유리된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닐까? 배움이 삶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해왔으나, 도리어 삶에서 멀리
코로나19로 인한 사회경제적 고통의 크기를 감히 비교할 수 있겠냐마는, 그 누구보다 연극, 무용, 뮤지컬, 오페라 등의 예술가들은 유독 어지럽고 지난했던 한 해를 보냈다. 공연장은 문을 닫았거나 열었다 해도 거리두기로 인해 객석의 절반도 채울 수 없는 생존 위기를 겪었고, 더욱이 절박한 생존 문제도 아닌 공연을 포기하지 않음이 예술가로서의 알량한 이기심처럼 비치며 생업활동에 죄책감마저 스미게 하였다. 특히 작년 4월까지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 및 영역별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지 않았던 탓에 이러한 혼란과 우울은 더욱 가중됐었다. 전염병
11월 3일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미 대선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정치행사이다. 위스콘신과 미시간에서 바이든 후보가 승리하면서 큰 이변이 없는 한 바이든이 새로운 미국 대통령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 측이 우편투표 무효소송 등 소송전략을 선택할 경우 공식적인 미 대선의 최종결과는 12월이 돼야 나올 가능성이 남아있다. 한국은 미 대선의 결과에 크게 영향을 받는 국가 중 하나인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국제정치 이슈인 북·미관계, 한·미관계, 미·중관계를 중심으로 이번 미 대선의
이해타산적이라고 말해도 별수 없지만, 나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 그것의 쓸모에 대해 생각한다. 대학원을 준비하면서 가장 화두가 되었던 것은 ‘배움의 쓸모’이다. 물어오는 사람들과 대화가 몇 차례 오갔을까, 배움은 물질적, 실리적인 쓸모가 없는 것으로 판가름 난다. 지적 유희 혹은 값비싼 취미로 바꿔 불리기도 하는 쓸모없는 배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부모님을 설득하기란 퍽 난감한 일이었다. 배움에 대한 내 감상은 너무나 허황돼 부끄럽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후 나는 자신을 적당히 포장할 수 있는 문장을 골라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고
고려대 일부 교수가 법인 카드를 부적절하게 사용해 논란이다. 13명의 교수가 서양음식점으로 위장한 유흥업소에서 2016년 3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1인당 1~86차례에 걸쳐 총 6,693만 원 가량을 썼다. 이 유흥업소는 심지어 여성 종업원이 접대를 하는 소위 ‘룸살롱’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이들의 행태는 대학이 지성과 교양의 최첨단에 위치한 곳이 맞는지 의구심을 들게 한다. 교내 연구비 등이 포함된 법인 카드는 교내 기금뿐 아니라 결국 학생들의 ‘등록금’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일까? 혹은 감각적 쾌락 앞에서 자신들의 생
강사법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다. 대학 강사의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강사법은 그동안 효력이 있었을까?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의 조합원 강사 대상 설문 결과에 따르면, 강사법 시행 이후 ‘기존보다 신분이 안정됐다고 체감한다’는 응답은 24.5%에 불과했다. ‘기존과 같다’가 37.9%, ‘아니다’가 37.6%로 나머지 응답을 이뤘다. 이처럼 지난 8월 시행 이후, 강사법은 이렇다 할 처우 개선의 성과를 뚜렷이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가 강사법을 위해 예산 217억 3,300만 원을 편성했으나, 실제 쓴 금액은 97억 원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