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기획] 사진과 키워드로 보는 근대 Ⅲ : 도시마지막 기획으로 식민도시 부산의 근대화 과정을 살펴본다. ‘항구도시’라는 부산의 지리적·지역적 특색은 일본에 의해 새로운 식민공간으로 탈바꿈하며 수많은 식민자를 이식한다. 식민자는 자본주의적 모순을 해결하는 분출구이자 생명선으로 부산을 활용하였고, 피식민자는 전근대와는 다른 도시 공간 속에서 ‘반일’과 ‘동경’이라는 모순을 동시에 경험한다. 식민지 시기 이후 근대 도시 부산에 나타난 변화는 무엇인가. 식민과 탈식민의 양가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근대 도시 부산의 모습을 살펴본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1960년대 중남미 붐 소설의 시대를 열면서 서구 문학의 첨봉에 섰다. 붐 소설의 성공은 서구 문화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정체성 위에서 그들의 문화를 제대로 소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문학은 세계 문학의 범주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기입할 수 있는가. 우리 문학만의 독특성과 주변부성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통해 그 대답을 찾아본다. 20세기 후반의 세계문학을 주도했던 라틴아메리카 현대소설은 ‘붐 소설’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붐’과 ‘소
20세기 혁명 가운데 멕시코혁명만큼 독특한 것도 없다. 멕시코혁명은 어떤 특정 집단의 이념적 혁명이 아니라 ‘토지’와 ‘자유’를 위한 농민 혁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멕시코혁명과 다른 혁명은 혁명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혁명의 과정과 결과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20세기적 격동을 앞장 서 보여준 멕시코혁명의 역사는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있는가. 근대의 다양한 모습을 추적하는 두 번째 기획은 특정한 당파적 견해도, 일관된 프로그램도 없이 다수의 지도자에 의해 여기저기 일어난 멕시코혁명의 모
언어는 탈식민주의를 둘러싼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이다. 네그리튀드 운동을 통해 전개된 탈식민주의 문학은 열강에 의해 분열된 아프리카인의 삶과 정서를 보여주고 아프리카 문학이라는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정작 아프리카 문학이 외래문명과 대화하기 위해 선택한 언어는 서구 문명의 것이었다. 과연 아프리카 문학에서 언어란 무엇인가. ‘세계 문학’의 이름으로 독자들의 가시권 내에 들어오지 못한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 문학에 대해 알아본다. 편집자 아프리카 출신 작가의 문학 작품이 국제적으로 명성
헨리 데이비드 쏘로의 『Walden』은 미국문학사에서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온 이래로 미국주의를 완성시키는데 크게 일조한 작품이다. 다시 말해서 영국의 영향을 받은 낭만주의시대를 거치면서 순수한 미국의 낙관적 이상주의를 꿈꾼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할만한 것이다. 그가 작품 속에서 인용한 공자의 사상은 비단 서양문학작품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문학을 다독하는 평범한 독서가들에게도 이전에 그 어떤 작품들로부터 느껴보지 못한 색다른 작품성을 맛보게 할 것이다.『Walden』은 쏘로가 1845년부터 1847년까지 2년 2개월 동안 깊은
“모든 사건들은 있을 수 있는 세계 중 최선의 세계에서는 서로 연계되어 있는 것일세. 자네가 퀴네공드 양과의 사랑으로 인해 그 아름다운 성에서 엉덩이를 발로 차여 내쫓기지 않았더라면, 종교재판에 처해지지 않았더라면, 걸어서 아메리카 대륙을 누비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남작을 칼로 찌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엘도라도에서 가져온 양들을 모두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이곳에서 설탕에 절인 레몬과 피스타치오 열매를 먹지 못했을 테니까.”『캉디드』 말미에 낙천주의자 팡글로스가 캉디드에게 던진 말이다. 이 문장들은 소위 불어 식으로 말하면
인간은 공간적 동물이다. 인간은 공간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며 삶을 영위한다. 인간은 공간 속에서 자신의 행위 근거를 찾고, 자기를 정립한다. 한편, 공간은 인간에 의해 창출되고 변형되며 소멸된다. 공간은 인간에 의해 비로소 공간다워지는 것이다. 이처럼 공간이 개인의 주체성 형성의 토대로 작동하듯이, 공간성 또한 공간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그 속에서의 인간 행위에 의해 창출된다.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이 공간이고, 공간이 인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낯익은 일상 공간의 의미에 천착해 삶의 역동성을 이해하고, 생성과 변화가 반복되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과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혹은 친구와 연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잔인한 폭력과 살상행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살인이라 일컬어지는 자살의 소식들 때문에 현대인들은 스스로 삶에 대한 불안과 인간 자체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것 같다. 이처럼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인간 흉포함의 근원은 무엇일까? 인간은 날 때부터 흉포함을 내재한 채로 태어났을까? 아니면 선한 본성이 내·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타락하게 된 것일까? 오늘 되돌아보고자 하는 소설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1954)의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 기술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채플린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도 자서전을 쓸 때는 많은 심적 부담이 있었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렇지만, 막상 채플린의 자서전을 읽으면 그런 부담감은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만큼 채플린의 자서전에 나타나는 배우의 마음은 솔직했고 생애 미화나 자기변명은 없었으며 당시 연인이나 가족 및 주변인물과 사회 환경에 대한 스케치도 담백한 편이다. 따라서 『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을 읽을 때에는 지나친 감정 표현이나 등장인물에 대한 호기심 또는 자극이 필요없다.일반적으로
90년대 시단을 ‘기형도의 시대’라고 정의해도 될 만큼 89년 기형도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끼친 영향력과 파장은 대단한 것이었다. 젊고 유능한 시인의 갑작스런 죽음은 생전에 일부 사람들에게만 평가 받았던 작품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제공했고 첫 번째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으로 발행된 『입 속의 검은 잎』은 이를 더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시에 대한 새로운 문법의 탄생. 범박하게 말하자면 ‘기형도식의 문법’은 20년이 지난 지금 시를 쓰고 읽는 이들에게도 그 자장을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한 시인이 시대를 대표하는 코드
오늘날 우리가 사는 근대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가. 이 과정의 근원을 묻고 계보를 확인하는 일은 학문의 영원한 화두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학원신문은 ‘전쟁’, ‘혁명’, 그리고 ‘도시’라는 키워드를 통해 근대의 역동적 발전과정을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근대의 다양한 모습을 추적하는 첫 번째 기획으로서 무기의 발달을 통해 전쟁이 변모해온 양상을 확인해보았다. 글 싣는 순서 제153호-전쟁 / 제154호-혁명 / 제155호-도시 인류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지식의 진보란 기존 지식의 틀을 해체하고, 근대 과학과 주류 방법론에 따라 구성된 지식의 독보적이고 특권적 지위를 전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학자의 임무란 기존 학문의 성과를 흡수하는 동시에 이를 강력히 비판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론과 연구 영역을 개척하는 것에 있다. 그런데 만일 현재의 인문학적 번역 작업이 편중된 서구 방법론의 위치에만 놓여 있다면 이론과 현실은 진실로 결합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 아래 이번 학술 면에서는 주류 방법론을 수단화하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자신들의 정체성과 현실 문제를 실천
아날학파에 대한 한국 역사학계의 관심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사건 중심의 딱딱한 역사보다는 지금까지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다양한 주제에 대한 그들의 연구는 “이런 것도 역사가 될 수 있는가”라는 감탄을 자아냈다. 또한 집단, 비교사적 방법, 장기지속, 집단 심성 그리고 독자의 ‘창조적 오독’과 같은 아날학파의 용어에 대한 이해는 역사학의 지평을 넓히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 소개된 아날학파의 모습에서 아쉬웠던 것은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러한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이해, 즉 구체적 연구
루시앙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로부터 시작되는 아날의 계보는 페르낭 브로델로 이어져 자크 르 고프와 조르주 뒤비를 거친 뒤 로제 샤르티에에 도달한다. 흔히 알려져있다시피 로제 샤르티에는 마크 페로와 함께 아날 4세대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그의 저서로는 『읽는다는 것의 역사』,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기원』 등이 국내에 번역되었다. 로제 샤르티에는 ‘책의 역사’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연구 주제로서 지성사, 문화사, 사회사, 정치사가 교차하는 대단히 흥미로운 주제이다. 샤르티에의 개념들 진지한 고려의 대상 되어야 로제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글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것이 논리적인 글쓰기가 아닌가 싶다. 구비시대에서 문자시대로, 다시 문자시대에서 영상시대로 바뀐 작금에 역설적이게도 논리적 글쓰기가 우리의 앞길을 좌우하는 생존수단이자 가장 중요한 재능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학생에 따라서는 학과 성적 대신 논술 쓰기로 대학에 들어가는 길이 마련되어 있으며 일부 회사에서도 논술을 부과하여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글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으나 아직도 글쓰기의 진정성을 인식하
남성 조각상들의 음낭은 어느 쪽이 더 클까. 한밤에 청어가 방귀를 뀌는 까닭은 무엇일까. 화장실 유머가 아니다. 노벨상 시즌에 맞춰 재미있으면서도 기발한 발상이나 이색 업적에 주는 ‘이그노벨상’을 수상한 연구 주제들이다. 이그노벨상은 모두 10개 분야로 올해로 18회째다. 수상 분야는 매년 바뀌는데 물리학, 화학, 의학, 생물학 등이 기본적으로 포함되고 문학,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같은 인문ㆍ사회과학 분야에도 상을 준다. 10개 분야에서 10건의 연구가 선정되는 것이 원칙이나 특별한 경우 한 분야에서 복수 시상도 한다. 심사와
1898년 출간된 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43-1916)의 『나사의 회전』(The Turn of the Screw)은 유령 소설에 속한다. 그러나 『햄릿』이나 『크리스마스 캐럴』과 달리 『나사의 회전』에 출몰하는 유령은 화자인 가정교사의 주관적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므로 심리 소설에 가깝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사실 고딕 문학 전통을 살펴보면 초자연적인 존재와 인간의 심층심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드거 알렌 포의 『어셔가의 몰락』에서 지하무덤에 매장된 매덜린 양의 생환은 초자연적
두 편의 중요한 소설이 나왔다. 이 소설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와 기억은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상처며, 봉합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흉터와도 같다고. 상처를 꿰맨 자리는 나을 것처럼 보이다가도 이내 격한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소설이라는 이야기는 바로 이 터진 곳을 봉합하려 하나 때론 터진 그곳에서 이야기의 틈새에 맺혀있던 울혈(鬱血)이 새어나오기도 한다. 어떤 이야기는 애도의 방식으로 그 상처와 결별하려고 하지만, 또 다른 이야기는 상처에 대한 그런 애도의 몸짓이 도대체 가능한지를 묻는다. 역사와 기억에 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처음에 2권으로 출간되었다. 1권은 1925년 7월 18일, 2권은 1926년 12월 11일에 출판되었다. 1930년에는 2권을 통합해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했던 1933년 12월까지 1500만 부가 팔렸다. 판매량은 2차 세계대전이 발생했던 1939년에 500만부를 돌파했고 나치 정권의 전성기였던 1943년까지 1천만 부 이상이 보급되었다. 나치즘 대두를 근심스럽게 지켜보던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신앙과 전쟁의 새로운 코란”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사상과
안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잦다. 사는 꼴은 비슷한데 왜 나만 바쁜 건지, 작은 열패감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치 주문을 외듯 저 사람의 미래보단 내 미래가 더 나을 거라고 중얼거려 본다. 오래 전부터 쭉 그래 왔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나 역시 고작 여기에 서 있다. 대체 어디쯤 닿아 있을 거로 생각했던 것일까. 위기는 끊임없이 내게만 찾아오고, 희망은 늘 타인의 삶에서만 엿보이고, 그럼에도 서로에게 올-인을 종용하는 이곳, 우리는 언제나 지구 위에 있었다. 그리고 중력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여기서 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