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혐오와 갈등의 전시장이 되어 버린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갈등 중 하나가 세대 간의 대립이다. ‘88만원 세대’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에 의해 기회와 권리를 박탈당한 청년세대에 대한 사유들은 이제 거의 상식이 되었다. 이번 총선을 통해 조금 나아졌지만, 진보·개혁 세력이 선거에서 패할 때마다 20대는 ‘개새끼’가 된다. 사회 구조의 문제를 지적하려는 먼저 청년은 스스로의 ‘노오오력’이 부족하지는 않았는지를 자문해야만 한다. 젊은 사람들이 주로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 상에서는 ‘개저씨’나 ‘틀니충
청년들의 삶과 정치를 통한 변화를 고민하는 입장에서 이번 총선 결과를 보고 가지게 된 질문이다. 이번 총선에 10명의 청년이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청년들의 삶이 크게 나아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번 총선의 당선자 중 ‘청년’ 정치인은 없지만 그럼에도 청년들의 삶이 크게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헬조선’의 현실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 때문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의 변화는 어느 순간의 급진적 변화가 아니라 천천히 조금씩 만들어진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우리가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만들 ‘청년정치’의 조건을 만
지옥이 있다는 가정 하에 그곳으로 떨어진 이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무엇일까? 동서고금의 지옥 표상을 염두에 두자면 먼저 떠오르게 되는 것은 육체적 고통이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온갖 고문도구와 집행인들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그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 것일지 상상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육체적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그것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절망일 것이다. 이 고통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 아마 이것이 육체적 고통보다 견디기 힘든 절대적 절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조르조 아감벤은 이렇게 말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메갈리아’에 관한 논의를 하려면 어쩌다가 그런 합성어가(메르스 갤러리 + 이갈리안의 딸들) 등장했는지, ‘미러링’(mirroring)은 무슨 뜻인지를 설명해야 했다. 그때에 비하면 현재의 ‘메갈리아’는 꽤나 익숙해진 단어다. 그만큼 파편적인 이슈가 보편적인 논쟁의 영역 안에 올라왔다는 의미다. 과연 ‘메갈리아’의 함의는 보편의 고정관념을 깨는 불쏘시개가 될 수 있을까? ‘메갈리아’의 함의는 간단하다. 이것은 ‘여전히’ 남자 중심으로 세상의 이치가 해석되는 풍토에 대한 한(恨)의 디지털적 표현이다. 많은 이
중등학교의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바꾸겠다는 정부와 여당의 방침이 발표된 이래, 국정교과서 문제는 한국사회의 ‘블랙홀’이 되어버린 듯하다. 어떤 비평가는 이를 두고 “서로 죽여야 끝나는 역사 십자군전쟁”이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과연 겉으로 보기에는 전 사회가 두 조각으로 나뉘어 사생결단을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 정도의 문제일까? 박근혜 정부의 교과서 국정화 방안은 약 10여 년의 전사를 가지고 있다. 그 출발은 2004년 노무현 정권하에서 태동한 ‘교과서 포럼’이었다. 이 단체의 결성은 뉴라이트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중세 유럽에서 탄생한 대학은 근대로 접어들며 국민국가 형성의 전초기지로 탈바꿈하였다. 국민국가의 지적 자양분을 공급할 원천으로 대학의 역할과 위치가 결정된 것이다. 칸트는 1798년에 쓴『학부들의 논쟁』에서 대학을 상급학부(신학부, 법학부, 의학부)와 하급학부(철학부)의 변증법적 통일체로 정의하여, 근대 대학의 발전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상급학부가 외부의 요청에 의한 타율적 지성이라면 하급학부는 외부로부터 독립된 자율적 지성으로 양자의 통일로서 근대 대학의 모델을 마련한 것이다. 요시미 순야는 『대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상급학부
문학연구자이자 비평가로서 내가 동의하지 않는 표현 중에 ‘청소년 문학’이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방향이든 간에 이런 범주로 문학적 카테고리를 설정하고 나면, 이 범주에 속한 문학에서 ‘청소년’은 ‘미성년’, 즉 아직 성인이 되지 못했으나 언젠가는 ‘성인’이 될 아이들이 되고, ‘청소년 문학’은 이들의 ‘성장’ 서사로 규정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성인’을 하나의 정상적이고 완성된 범주로 보고, 그 관점에서 ‘청소년’은 그 완성태로 가는, 그러니까 아직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로 규정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미성숙과 미발
전공이 철학이고 직업이 가르치는 것이라 세월호 참사를 보며 자주 떠올린 문제가 있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 수 있을까?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에 따른 결과는 참혹한 몰살이었다. 만일 당신이 세월호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느냐는 질문에 대학생들도 대부분 가만히 있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큰일 났다. 제2, 제3의 세월호가 생겨도 박근혜 정부는 국민을 구해줄 수 없을 텐데 어떡하나? 정부가 스스로 변할 리 없으니 우리가 변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학생들은 철학자 헤겔의 눈으로 보면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지 2년이 지났다. 취임 2주년을 며칠 앞두고 박 대통령은 이런 얘길 했다고 한 다. “우리 경제를 생각하면 저는 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여러 노력이 필요하지만, 지난번 부 동산 3법도 작년에 어렵게 통과됐는데 그것을 비유로 하자면 아주 퉁퉁 불어터진 국수입니다.” 이른 바 ‘경제 불쌍론’ 혹은 ‘불어터진 국수론’으로 불리며 실소를 자아냈던 발언이다. 철옹성 같던 대통령 지지율은 그 많던 부적격 인사 논란, 세월호 사태, 청와대 문건 사태에도 큰 변 화가 없었다. 지지율에 눈에 띠는 변화가 감지된 건 ‘연
따뜻한 봄날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이 만추의 하늘을 지나려 하고 있다. 창졸간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유가 족들의 슬픔도, 사랑하는 이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실종자가족들의 비통한 울음도 현재진행형이건만, 또 세월은 많은 이들에게 이 사건을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만들어갈 것이다. 이런 세월의 법칙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사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되돌아보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누구 때문이야?!” 사건 직후 열화 같았던 책임자 추궁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는 당연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에서 극단의
지난 9월 21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미국 뉴욕의 맨해튼 거리에서 행진에 나섰다. 지구적 차원의 온실가스 감축 정책을 촉구하는 거리행진에 동참한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이 오죽했으면 거리행진까지 나섰을까? 그만큼 기후변화는 심각해지고 있다. ‘6번째 대멸종’얘기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지금같은 속도로 기후변화가 진행되면, 지구상의 생물종 절반이상이 멸종하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째 대한민국은 너무 조용하다. 기후변화는 대한민국의 정치에서 의제로도 취급되지 못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기후변화에 가장 취약한 국가이다. 식
그때는 그랬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땐 TV드라마 ‘전우’를 흉내 내어, 국방군과 인민군으로 편을 짜서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놀이를 즐겼고, 중학교에 들어가선 군복을 연상케 하는 검은 교복을 입고서 선생님과 선배들을 마주치면 ‘멸공’(滅共)을 외치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학교 건물에는 ‘멸공’이라는 빨간색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고, 교실에 들어서면 ‘초전박살’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공산당’ 같은 구호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뒷자리의 게시판 한 가운데엔 자랑스러운 태권소년이나 국방군이 이단옆차기와 총검술로 뿔 달린 인
사람들이 이제까지 사용하던 제도를 그대로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개는 현행 제도에 익숙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제도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도 크다. 이런 경우 다른 제도와 비교하여 현행제도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에서 현재 선거에 사용하고 있는 제도(당선일 결정 방식과 의석배분 방식)는 어떤가? 우리는 거의 매년 공직 선거를 치르고 있다. 5년마다 대통령선거가 있고 4년마다 국회의원선거와 지방선거가 있으며, 사유가 발생하는 경우 재선거 혹은 보궐선거도 치르
아이들은 죽어가고, 노인들은 세상을 망치고 있고, 나머지들은 무력한 탄식 속에 늙어간다. 2014년, 4·16 이후의 시간. “난파선”의 목격자(Shipwreck with Spectator)라는 은유가 실재가 되어 있는 시간. 더 많은 침묵과 숙고와 절망과 분노와 반성의 시간이 아마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3·11 이후의 일본과 9·11 이후의 미국처럼 자숙과 길 잃은 분노는 대재앙 후의 초반동사회를 낳을 수도 있다. 우리는 더 많이 생각하고, 그러니까 계속 말을 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자숙해서는 안 된다. 우리
요즘처럼 죄스럽고 무기력한 느낌이 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 수많은 인명을 죽게 한 국가의 책임에 대해 대통령의 사과도 확실하게 받아내지 못하는 한국사회, 무능하고 출세와 보신만 추구하는 공직사회에 대해 수습할 때까지는 그래도 자리는 지켜야 된다고 요구할 수밖에 없는 사회, 지방선거를 의식해, 혹시 잘못 이야기 했다가 불똥이 튀지 않을까 입 다물고 있는 정치인들. 어쩌다가 한국사회가 이 지경으로 치달았는지,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 무력한 존재감만 들뿐이다. 세월호 참사사건을 보는 국민의 시각은 단순히 어린 학생들과 무
오랫동안 미국 하버드 의대 교수를 지냈던 제임스 길리건은 살인과 자살의 발생 빈도가 정치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강조해왔다. 그는 1900년 이후 108년 동안의 통계를 통해 지나친 시장 경쟁을 강조하고 그 결과 실업과 불평등 등 사회적 패배자를 양산해 온 정부에서는 어김없이 자살과 살인의 빈도가 높았음을 밝혀냈다. “우리는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 2011년 한 칼럼이 진단했던 우리사회의 단면이다. 당시 하월곡동·평택·안양·전주·강릉에서 “어린 소녀도 죽고, 대학생도 중년도 노인도 죽었다. 일자리 못 찾고 실직하고 벌이가 적
지난 10월 4일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열린 서평회에서 『전후라는 이데올로기』(현실문화, 2013)의 저자 고영란 선생님(니혼대 문리학부 국문학과 준교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눴다. 3·11(2011년 발생한 일본 대지진)과 일본 사회의 변화에 대한 여러 가지 사례를 들을 수 있었다. 2011년 이후 일본 대중잡지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메이저 신문과 방송은 원전 문제를 비롯해 문제적인 정치 현안을 제대로 보도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미디어가 문제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본의 여성잡지와 대중잡지가
현대적인 괴담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학교는 지극히 현실적인 위험성을 언제나 그 내부에 담고 있다. 특히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괴담에서는 학교폭력이나 왕따의 문제가 그 가장 명확한 배경이나 원인으로 대두되었을 때, 그러한 위험성은 학교의 제도, 가르침과는 무관한 예외적 상황인 양 문제 학생들 개인이나 가정의 차원에서 취급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그러한 문제는 이미 학교라고 하는 제도 내부에 기입되어 있는 예외상황이지 않은가. 애초에 학교가 더 이상 앎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제도권 교육의 기계부품이 된 순간부터, 학교는
공안정국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다. 언론은 연일 국정원발 기사들을 쏟아내고, 확인되지 않은 혐의들이 확정된 사실로 다뤄진다. 엄연히 한국 민중가수가 만든 곡과 일제 강점기에도 불렸던 노래가 북의 혁명가요로 둔갑하고, 우리 돈으로 33만원 정도의 루블화가 공작금이 된다. 이쯤 되면 당선축하 편지가 충성서약 편지로, G-mail 사용이 북의 지령을 받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진지하게 흘러나오는 것은 당연지사다. 국정원은 ‘댓글 공작원’에서 하루아침에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거듭났다. 이 난장판에 보다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는 목소리
지난 8월 31일 ‘인문학협동조합’이 창립총회를 열고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갈수록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는 젊은 인문학 연구자들의 각성과 결의로부터 출발한 모임이다.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위기의식이 커진 가운데, 이른바 비정규직 인문학 강사들이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도모한 자구책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인문학 본연의 상상력과 태도, 노동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며 당차게 창립 선언을 외친 인문학협동조합의 최병구(성균관대 국문과 박사 졸업) 총괄이사와 홍덕구(동국대 국문과 박사수료) 총무이사를 만나 자세한 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