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학기를 마치고 석박사통합 학기가 시작되었다. 문화콘텐츠·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간 학과. 이 길고 거창한 이름 어딘가에 배움의 자리가 있을까. 문화이론, 미학, 미술사, 영화, 영상콘텐츠, 게임, 도시 기획까지. 인문학을 기반으로 사회·문화적 현상인 무수한 이미지 재현물과 매체를 읽어내는 방식을 습득하는 과정은 길고 막막하기만 하다. 학제를 넘나드는 분야에서 그야말로 ‘쏟아지는’ 텍스트들을 소화해야 하는 압박. 게다가 전공 분야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 역시 병행해야 하는 날들을 겨우 따라가는 동안 다섯 번째 학기가 지나가고 있다
대한민국이 국제개발협력에서 더 성공적인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특수성과 국제사회의 현실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 UN기준 193개 국가 중에서 대한민국은 단일민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문자를 사용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아프리카에는 한 나라에 평균 40개의 언어가 있다. 또 대한민국이 식민지배를 하지 않고 공여국(Donor Country)이 된 것은 도덕적으로 자랑스러운 것이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과거의 피식민지국가가 현재의 수원국(Recipient Country)이므로 대한민국은 수원국을 잘 모른다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소위 ‘대장동비리’와 관련된 회사에서 30대 초반의 청년이 6년도 안 되는 기간을 근무하고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았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젊은 사람의 퇴직금이 50억이라는 것은 모든 국민이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회사측에서 산재로 인한 위로금 성격과 문화재 업무를 효과적으로 처리한 대가 등이 포함되어 그 금액이 책정된 것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문화재를 법으로 보호하는 것은 어지간한 틀을 갖춘 국가라면 모두 시행하는 제도이기에 개발행위 과정에서 문화재가 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2004)는 다음의 안내문으로 시작한다. この映画は、東京で実際に起きた事件をモチーフにしています。しかし、物語の細部や登場人物の心理描写はすべてフィクションです。 (이 영화는, 동경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모티프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세부사항이나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전부 픽션입니다.) 영화에서 실화를 기반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그렇게 이례적은 일은 아니나 이 영화의 안내문이 유독 별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안내문이 강조하는 내용이 ‘실화’가 아니라 ‘픽션’에 있기
한강의 신간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기 위해서는 우선 소설 속 서술자인 소설가 ‘경하’가 놓인 정서적 상황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경하는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역사적 학살의 기억을 소재로 출간한 자신의 전작의 영향력에 사로잡혀 있다, 그 소설을 써 내려가며 온몸으로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 이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종의 정신적 후유증으로 인해 가족과도 떨어져 홀로 무기력증에 견디며 새로운 글을 쓰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진다. 한강의 전작 소설 『소년이 온다』(창비, 2014)를 환기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구도
우리는 넬리의 환상을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혹은 마리옹의 딸 넬리가 자신과 같은 나이인 과거의 마리옹을 만나면서 시공간이 허물어지는 영화를 보고 있는 걸까. 마리옹의 남편은 어떻게 두 사람(현재 넬리와 과거 마리옹)을 한 공간에서 만날 수 있었을까.그러나 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많은 물음을 무색하게 만든다. 미래에서 왔냐고 묻는 어린 마리옹에게 “네 뒤로 난 길을 따라왔어.”라고 말하는 넬리를 통해 알 수 있듯 영화에서 넬리가 겪는 일이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구분하거나 현재와 과거를 경계 짓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코로나로 인해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빠르게 도래하면서 ICT(정보통신기술)를 활용한 기술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실감형 콘텐츠를 언어 교육에 접목하는 시도 역시 늘어나고 있다. 실감형 콘텐츠는 인간의 감각과 인지를 자극해서 실제와 유사한 경험과 감성을 확장하는 기술로,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이 대표적이다. 가상현실은 현실과 유사한 경험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에 학습 몰입도를 높일 수 있고 자기주도적 참여자로 이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증강현실은 학습자의 현존감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상호작용 활동을 유도하는
미국은 1969년 아폴로 11호를 시작으로 총 여섯 번에 걸쳐 자국의 우주인을 달 표면에 착륙시켰다. 사실 얼핏 보면 달 탐사는 우주 공학과 달 지질학 등을 연구하는 지극히 과학적인 목적의 우주 탐사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당시 미국 정부와 시민들이 아폴로 탐사를 대했던 방식을 보면 오히려 과학보단 정치를 내세운 선전용 행사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러한 탐사의 왜곡된 목적성은 아폴로 미션 자체가 선전을 위해 조작된 허구일 것이라는 음모론이 유행하는 안타까운 배경을 제공했다.) 그런 성격을 아주 잘 보여주는 면이 있
우리가 지구온난화와 환경 문제를 걱정하면서, 쓰레기와 환경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기업들의 책임이 높아지고 있다. 기업들이 대내적으로는 환경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제품을 생산하고 있지만, 대외적으로 친환경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할 때가 많다. 이처럼 온갖 홍보 수단을 동원하여 실제와는 다르게 환경을 생각하는 기업 이미지를 구축하는 행위를 그린워싱(Greenwashing) 또는 위장환경주의라 일컫는다. 그린워싱이라는 표현은 1986년에 미국 뉴욕의 환경운동가 제이 웨스터벨트(Jay Westervelt)가 피지섬을 방문했을 때 어느
국가의 목적 눈으로 보이는 형태가 있든 없든, 인공물 대부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 연필은 쓰기 위한 것이고, 도로교통법은 도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근대 국가와 정치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특정한 목적을 위해 발명된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항상 의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국가는 산이나 강처럼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으로 느껴지고, 어느 순간 질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문화적 생산물이 자연적 사물로 이해되는 순간, 비판적 사유는 불가능해진다. 근대 민주주의 국가
며칠간 비가 왔고 여름내 돌아가던 에어컨을 껐다. 창문을 여니 물기 있는 바람이 훅 들어온다. 공기가 선선하다. 계절과 계절의 사이 자연스러운 연결은 공기가 한다. 이 공기는 보이지 않지만 알 것 같은 것. 예감이다. 오후에는 모처럼 카메라를 들고 한강을 걸어보려 한다. 나는 일이나 프로젝트가 아닌 일상에서 카메라를 잘 들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어떤 날은 문득 사진이 찍고 싶어진다. 오늘처럼 카메라를 들고나가는 날이 그렇다. 무언가 찍을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준비를 마친 후 집을 나서기 직전, 거실에 앉아 새 필름을 뜯어 카메라
자유가 있는 숲길 안개 가득한 숲길에서 보았어요. 숲으로 갈수록 박자는 빨라져요 가자. 가자. 외치는 숲길. 신발을 거꾸로 신고 숲길을 뛰어다녔어요. 딛으면 딛을수록 꺼지는 땅에 서 있어요. 꺼지는 땅을 밟고 서있어요. 여기서부터 나의 땅이에요. 꺼지는 땅에 서 있는 기분을 아세요. 꺼지는 땅에 서 있어도 밟을 곳이 있다는 마음. 그걸 안심하는 마음이라고 불러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서 있어요. 지겨워도 꾹 참고 잘 왔어요.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어요. 여기까지 왔을 때. 이끼가 드문드문 있고 깊어갈수록 침엽수가 많아지는
지지부진했던 계절이 끝나가고 있다. 얼굴이 시릴 정도로 찬 공기가 필요하다. 습하지 않은 냉기가. 나에게 여름이란 모든 것들을 다 견뎌야만 하는 계절이다. 지나치게 긴 낮을 견뎌야 하고, 습한 온도를 견뎌야 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견뎌야 하고. 여러모로 소란스러운 계절이다. 빨리 추워졌으면 싶다가도 여러 이유들로 인해 두렵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계절인 겨울이 온다는 건 연말이 가까워진다는 뜻이고, 그건 올해의 남은 날들을 점점 깎아 먹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축적일까, 아니면 소진일까? 지난 7월에
지난 주말에는 돼지 막창을 먹었다. 주말 이후로 몇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는지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체질적으로 돼지 고기가 몸에 안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돼지 고기를 계속 먹는 건 맛있기 때문이겠지. 기름진 음식에 알코올 한 잔을 기울이는 것은 내 삶의 재미 중 하나다.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육식주의자다. 그러나 이런 나의 육식 행위가 점점 부끄러워진다. 불과 며칠 전까지 돼지 막창을 맛있게 먹은 내가 이런 글을 쓴다는 것도 부끄럽지만 말이다. 채식을 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명확하다. 동물보호는 물
계획이 어그러졌다. 석사 과정을 수료한 지 반년이 흘렀다. 계획대로라면 석사 마지막 학기에 논문을 완성해야 했다. 쉽지 않다는 걸 깨닫고, 혹은 그렇다고 합리화한 뒤 한 학기 유예했다. 포기하고 취업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선배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 끝까지 써보기로 했다. 변경된 계획안은 상반기에 논문을 통과시키고 하반기에 취업하는 것이었다. 애초 계획보다 1년이 밀려났다. 시간을 더 할애했지만 이번에도 끝을 내지 못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커져가는 취업 압박, 단조로운 일상에 대한 피로감, 부족한 논문 작성 능력 등 변명거리는 많
관계를 면대면의 익숙함으로 배운 나로서는 비대면 수업이 다소 곤혹스럽다. off된 채 이름만 보이는 화면을 날카롭게 응시한다. 요것 봐라! 라면서. 얼굴을 봐야 수업 리듬을 더 잘 찾을 수 있을 듯 싶어, 은근슬쩍 얼굴을 보여주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에게 꽤나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화면을 켜라고 강요하지도, 그걸 포기하지도 못한 애매한 시도다. 어떤 이는 나의 ‘느슨함’에 경고를 주기도 하지만, 아직 나는 모두가 얼굴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그저 소망으로만 남긴다. 여성학전공자로서 디지털 폭력과 유포의 현
나는 이 글을 2021년 8월 9일에 청탁을 받았다. 청탁서에는 최근 손가락 표식을 둘러싼 논란에서 GS25와 스타벅스가 그러한 잡음에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행위로 인해 “기업(나아가 사회)의 여성 지우기”에 기여한다는 문제의식이 소개되어 있었다. 기업들의 사과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과 성별의 양극화를 불러오는 일로, 이 사건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더욱 심도 있는 논의를 부탁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글을 마무리 중인 날짜는 2021년 9월 6일이다. 청탁일로부터 대략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에는 도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