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영역에서 논픽션, 즉 일기나 서한, 수필 등과 같은 에세이 장르의 글을 경시하는 태도가 실제 현실에 부과하는 모종의 이데올로기적 효과의 폐해는 심각해 보인다. 글쓰기의 문제가 우리의 실제 삶과 근본적으로 유리된 차원에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문학’(文學, 동시에 언제나 聞學)의 엔터테인먼트화. 언제부턴가 문학이 우리의 생(生)을 서술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 초라한 현실은 우리가 타인의 목소리를 들을(聞)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타인에게 반응(respond)하는 능력(책임; responsibilit
잇달아 있는 약속을 위해, 번역자문 관계로 들른 출판사에서 막 나오는 길이었다. 출판사 주간이 한번 읽어보라고 들려준 책을 꺼내 들었다. ‘프롤로그, 2009, 2010, 2011……’ 뭐에 대한 책인지 알기 위해선 또 다시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선, 지하철역 긴 의자에 앉아 약속시간도 잊은 채 십여 번의 전동차가 지나가도록 이 책에 빠져들었다.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에 관한 책이다. 라디오 피디인 정혜윤씨가 참가자 스물여섯 명의 구술을 바탕으로 집필하였다. 이 책은 파업을 전후로 한 상황뿐만 아니라, 참가노동자
1987년 1월 14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신학부 학생회 연구소는 베를린 자유대학의 야콥 타우베스(Jacob Taubes) 교수를 강연자로 초청한다. 이 무렵 야콥 타우베스는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강연 요청을 받아들이고 2월 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월, 화, 목, 금, 나흘에 걸쳐(수요일은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 하루에 세 시간씩 「로마서(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학생들과 함께 읽고 그 의미를 새긴다. 192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야콥 타우베스는 대랍비였던 아버지로부터 정통 랍비 교육을 받고 랍
국제인권법은 글로벌 수준의 UN인권법 체계와 유럽, 미주, 아프리카의 지역별 인권법 체계로 나뉜다. 유엔헌장과 세계인권선언에 기초한 유엔의 인권보장법 제도는 포괄적이지만 국가에게 관련 조치를 취하도록 구속할 강제력은 미미하다. 이에 비해 특히 유럽 각국에는 유럽인권협약을 통해 인권침해를 유럽인권법원(EHRC)에 제소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보편적인 국제사법 관할권이 적용되고 있다. 유럽에는 두 개의 인권 관련 문서가 있다. 사회권에 속하는 인권 목록을 심의하는 EU인권헌장과 시민적, 정치적 자유를 주로 규정한 유럽인권협약이다. 유럽인
얼마 전 ‘밀양전’(박배일 감독)이란 다큐멘터리를 봤다. 밀양 송전탑을 둘러싼 할머니들의 투쟁을 담은 수작이었는데 말미에 한 할머니가 경찰에게 이런 말을 했다. “왜 한전만 지켜주고 우리는 안 지켜주냐?” 국가주권, 예외상태, 통치성 등에 관한 난해한 이론들을 한 마디로 압축한 말에 적잖이 감동했고 당황했다. 섬광처럼 빛나는 통찰과 흔들림 없는 진리란 냉철한 논리가 아니라 처절한 외침에서 깊이와 맑음을 얻는다는 사실에 경탄했고, 삶이 막다른 골목에 내맡겨져 인간의 언어가 분절되지 않은 목소리처럼 들릴 때 진리가 비로소 현현한다는 사
세월호 참사로 인해 하나의 질문이 던져졌다. ‘이것이 국가인가?’ 이 물음에는 ‘이런 것이 국가가 아니다’라는 사회적 환상이 담겨 있다. 국가라면 당연히 국민의 안전을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고, 위험에 처한 국민을 구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목격한 것은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세월호의 승무원들은 대부분 단기 계약으로 일하는 비정규직으로 위급 상황에 대한 대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고, 해경은 구조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방관했으며, 정부는 상황을 파악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한 채 인명을 구할 수
언어를 통해서 경험을 서술할 때, 즉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모든 이야기의 밑자락에는 물론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한다. 따라서 모든 이야기는 욕망의 구조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될 수밖에 없다. 수잔 스튜어트의 의 발상도 그것이다. 이야기는 어떻게 욕망을 떠안는가, 혹은 욕망의 구조는 이야기에 어떻게 새겨지는가. 욕망의 구조란 무엇인가. 욕망은 그 대상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대상과의 거리를 벌려놓는다. 기호적 차원에서 욕망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간극을 기입하며, 이
일용직 노동자나 박봉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에게 생명을 바쳐 회사를 살리기를 요구할 때, 그렇게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공동체는 개인의 생명과 욕망과 자유를 실현하는 도구인가? 아니면 개인이 공동체의 도구인가? 어리석고 부적절한 질문을 던진 것 같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이런 생각과 질문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어찌됐든 공동체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실현하고 확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매체이면서, 우리네 삶의 주체이기도 하다. 개인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는 자유주의자, 사회계약론자에게 공동체와 국가의 인륜성을 강조하고 그것에 동화되기
소설은 역사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다. 격동기에 등장한 소설들이 앞질러 시대의 징후를 감지해내고 그 향방을 예견하거나, 시대가 남긴 딜레마를 성찰의 거리로 전환하는 일에 독보적인 존재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라면, 아니 중국의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문화대혁명 전후의 중국문학이라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질 것이다. 훗날 문화대혁명을 비판하며 내란으로 규정해본들, 당시의 삶과 그 삶을 살아내야만 했던 사람들의 사연 많은 곡절들이 훌쩍 증발해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가 손쉽게 넘겨버린 역사의 페이지
북한 공식경제 작동하지 않나? 북한경제 연구자들은 단순히 북한 경제의 참혹함을 강조하거나 계획경제의 비효율성만을 주장하면 북한경제 현실을 이해할 수 있다는 신화를 갖고 있다. 그들이 북한이탈주민이 구술한 내용을 자신들의 입으로 각색하면 그것이 북한경제 현실이고 진리가 되어 버린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연구자들은 북한이 발표한 자료에 기초하여 분석하고 문제점을 밝혀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어느 누구도 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북한의 공식경제는 붕괴되었고 비공식부문의 활동으로 그럭저럭 버텨나가는 상황이라는 결론에서 북한경제 연
주체화(subjectivation)는 현대 유럽 철학 및 인문사회과학에서 가장 주목받는 개념 중 하나다. 주체화라는 개념은, 단어 자체가 함축하듯이 주체를 자연적으로 주어지거나 불변적인 본질을 갖는 어떤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되고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개념은 미셸 푸코가 그의 후기 저술들에서 처음 고안해냈으며, 그 이후 다양한 이론가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원용되고 변용되고 있다. 가령 자크 랑시에르는 주체화의 문제를 자신의 민주주의론의 주요 요소로 제시하고 있으며(자크 랑시에르, 『불화』, 길, 2014
안녕하신지요, 안녕이라는 말 자체를 꺼내기가 어려워진 이 기이한 시대에,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인사를 건네며 편지 한 통을 띄웁니다. 사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4월 아르헨티나 출신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가 사망한지, 그리고 지난 2월 자메이카 출신의 문화연구 이론가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이 사망한지. 단순히 본다면 그저 소위 ‘제3세계’ 출신으로서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두 좌파이론가의 흔하디흔한 죽음일 뿐일 겁니다. 그리고 또한 이들의 죽음은, 바로 지
아비 바르부르크(1866-1929)는 미술사라는 한정된 학문 분과를 넘어 동서양 고대 문명에서 동시대 대중 매체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이미지의 관계를 폭넓게 사유한 학자다. 그의 학문적 유산은 수십 년 동안 어슴푸레 거의 잊혔다가, 지난 세기 말 전집이 출간된 이후 서구 인문학계를 필두로 활발히 논의되고 재해석되는 중이다. 인간은 이미지를 만드는 주체로서 그 이미지를 매개로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바르부르크의 일생을 요약한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필사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말년의 이미지 수집 프로젝트 『므네모시네
내가 원래 청탁 받은 내용은 ‘학술 신간’이었다. 하지만 청탁서의 요지와는 전혀 어긋나게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최형익 옮김, 비르투, 2012)을 서평 대상으로 삼은 것은 역으로 오늘날의 ‘학술 시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싶어서이다. 너무나 많은 책이 ‘학술’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고, 또 책마다 ‘신간’이라는 주장을 내세우지만 과연 이름에 걸맞은 책인지 회의가 드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청탁을 받고도 똑같은 고민에 부딪힌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일종의 우회를 하게 되었다. 마르크스
인류는 유토피아를 꿈꿔온 만큼이나 디스토피아를 상상해왔다. 흔히들 유토피아를 그리스어 ‘유’(ο /not)와 ‘토피아’(topos/place)의 합성어로 이해하지만, 그 실제 함의를 따지면 ‘에우’(ε/good)와 ‘토피아’의 합성어이다. 요컨대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 아니라 ‘좋은 곳’이다. 유토피아의 반대말인 디스토피아의 접두어가 ‘뒤스’(δυσ/bad)인 것이 그래서이다. 즉, 디스토피아는 ‘나쁜 곳’이며, 서사 장르로서의 디스토피아는 ‘나쁜 곳’에 관한 이야기인 셈이다. 인류는 무엇을 나쁜 것이라고 상상해왔을까
최근 번역된 아감벤의 『도래하는 공동체』(꾸리에, 2014)에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디스토피아 속에서 현대인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구원의 잠언들이 담겨 있다. 그의 주저 『호모 사케르』가 그렇듯이 이 책에서도 아감벤이 그 유려한 사유의 탐색을 시작하는 장소는 바로 이탈리아어의 오랜 어원에 있다. 예컨대 ‘임의적’이라는 뜻의 형용사 ‘쿼드리벳(quodlibet)’의 라틴어 어원을 집요하게 들추어내서 그로부터 인간 존재의 특이성에 관한 철학적 통찰을 이끌어내는 사유방식은 아마도 아감벤의 애독자라면 낯설지 않은 장관 중 하나일 것이다. 언
우리 시대에는 그동안 주변부에만 머물러 있던 ‘감정’의 영역이 삶과 담론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변화는 사실 19세기의 문을 닫으며 20세기를 열었던 프로이트에서부터 시작한다. 프로이트 이론이 현대문화 분석에 끼친 두 가지 중대한 영향은 ‘개인 심리’와 ‘일상’이 더 이상 평범한 것, 그래서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데 있다. 의식되지 않는 것(무의식),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것(말실수), 진부한 가족의 역사(유년시절의 경험), 억압되었던 욕망(성) 등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담은 것이 되었다. 불안, 공포,
우리의 정신생활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중 감성보다 더 우리 존재의 특성과 의미에 중요한 것은 없다. 감성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며 또한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데카르트, 홉스, 흄과 같은 위대한 고전 철학자들이 감성에 대한 제 나름의 이론들을 갖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정녕 놀라운 것은 20세기의 철학자들 대부분이 이것에 대해 소홀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정서(emotion)’ 및 이와 유사한 용어들이 포괄하는 매우 다양한 현상들이 깔끔하게 정돈된 이론을 허용치 않았
이 책을 중간쯤 읽고 났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손에는 아직 읽지 않은 절반의 모비 딕이 남아있다’ 그러자 엄청난 행복이 밀려왔고 마저 읽어 버리는 게 두려워졌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 해 두자”라는 유명한 첫 문장으로 모험을 시작하자. 우선 ‘물보라 여인숙’이 당신을 반길 것이다. 기나긴 항해를 마치고 지금 막 도착한 선원들이 목구멍에 술을 콸콸 쏟아 붓는 그런 곳이다. 포경선을 타기 위해 이 도시에 온 이슈메일은 운이 없었다. 그날 밤 여인숙에 남아있는 잠자리라곤 작살잡이가 차지한 침대 반쪽뿐이니 말이다. 헌데 이
자크 데리다의 『문학의 행위』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고색창연하게 느껴지기조차 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성격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주로 70∼80년대에 발표된 글과 80년대의 끝자락에 이루어진 인터뷰를 모아 90년대의 초입에 출간된 책이니만큼 그런 느낌을 갖는다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행위』는, 편집자인 데릭 애트리지 역시 지적한 바대로 “소소한 ‘문학적’ 관심으로 보이는 것에 대항하면서 ‘철학적’인 해체를 옹호”함으로써 “‘문학적인’ 데리다보다 ‘철학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