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는 사람이 된 후 책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서, 여러 형태의 서점이나 잡지, 신문에 자주 책을 추천했다. 여름 휴양지에서 읽기 좋은 책(휴양지에서는 쉬는 게 제격이다)의 리스트이기도 했고, 좋아하는 추리소설(언제나 레이먼드 챈들러)이기도 했고, 영향을 끼친 작가(자주 바뀐다)의 이 름으로 몇 권의 책을 꼽기도 했다. 어떤 리스트는 겹치고, 어떤 리스트는 조금 다르거나 전혀 다르다 . 당연한 일이다. 어떤 책은 늘 좋고, 어떤 책은 특별히 좋은 때가 있으니까. 변함없이 흥미로운 책도 있다. 내 경우엔 사람에 관해 쓴 책
이창동 영화의 주인공들은 단일한 정체성이나 의미로 수렴되지 않는다. 그들은 질서체계 안에 있으면 서도 종속을 거부하는 비결정적인 그 무엇이자 인과적 기호에 흡수되지 않는 의미의 빈자리이다. 이 것이 내가 이창동 영화에 접근하면서 ‘타자성’이라는 화두를 끌어들여야만 했던 이유다. 문제는 그 기묘한 캐릭터들이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련의 관계망을 통과하면서 그들의 타자 로서의 입지는 불편한 질문을 생산하며 입체화된다. 그들은 주변사람이나 상황과 관계를 맺는다. 비결정적인 의미의 빈자리인 그들이 그 관계망에 친밀하 게 용
1. 한국 대학의 몸집 불리기 근대적인 의미에서 한국 대학의 역사적 기원으로 소급해 들어갈 때 불행하게도 일제시대를 기점으로 잡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 제대로 된 종합대학(University)에 그나마 가까웠던 것은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이 유일했다. 1946년 해방 직후 경성제국대학은 미군정이 이식한 ‘국립대학안’(국 대안)을 계기로 ‘국립서울대학교’로 전환되었고, 1949년 토지개혁정책의 일환인 농지개혁법을 계기 로 다수의 지주와 토호세력이 과세와 토지몰수를 피하기 위해 우후죽순으로 사립대학을 설립했다. 즉 고려대학교
미국의 재즈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독자라면,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1925)를 흥미롭게 읽은 독자라면 주인공 개츠비의 필생의 사랑인 데이지 뷰캐넌의 모델이 누구일까 궁금해 할 법하다. 첫 소설 『낙원의 이편』(1920)부터 피츠제럴드는 주로 자전적인 경험을 소재로 작품을 썼기 때문이다. 최근에 만들어진 바즈 루어만 영화 (2013)에서라면 데이지 역을 맡은 캐리 멀리건의 모델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제임스 웨스트 3세의 『완벽한 시간』(2005)은 그 데이지의 모델이 피츠제럴드의 첫사랑이었던 지
‘생명’의 문제는 모든 탐구들 중 유독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이다. 인간이란 살아 있는 존재이며, 그의 모든 행위의 의미는 이 생명이라는 사실 위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고래로 많은 철학자들은 생명의 개념을 분명히 하려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의 세계를 ‘종’ 개념을 통해서 이해했고, 때문에 그의 세계는 종들의 유기적인 체계라는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 진화론이 등장하면서, 종이란 개체군이 끝없이 진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성립하는 일종의 평균치라는 생각이 등장했다. 이는 곧 종은 영속적
가족, 세상이 험할수록 버팀목이 된다는 존재들. 요즘 시대에도 그럴까? 애써 키운 자식들을 시체로 맞아야했던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가족이니 내 일처럼 열심히 해달라는 소리를 듣다 하루아침에 경영상의 이유라며 해고되는 사회에서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은 희망보다 한(恨)의 소재가 되기 쉽다.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성공보다 실패를 연이어 경험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가족은 희망고문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 가족』은 “그저 위선에 가득 찬 역할극”
자본주의 시대, 타자의 문학을 묻다 지난 11월 14일과 15일 양일간 본교 법학관 모의법정에서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이 주최하는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번 학술대회는 ‘아래로부터의 글쓰기와 타자의 문학2―노동·자본의 문화적 전회, 또는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이미 ‘아래로부터의 글쓰기와 타자의 문학1’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글쓰기’, 보다 구체적으로는 1970~80년대 한국의 노동자들의 글쓰기와 노동문학에 주목하여 의미 있는 연구 성과들을 제출한
이번에 나온 『말과 활』 6호는 모든 이의 눈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센세이셔널한 글이 실렸다. 윤인로의 글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것, 억제할 수 없는 메시아적인 것: 사상경찰 진태원의 팔루스를 절단하는 절차」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 센세이션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진태원의 입장이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윤인로의 글은 더욱 큰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원칙적으로 출판되어서는 안 되는 수준 이하의 글이었다고 본다. 우선 윤인로가 가하는 진태원에 대한 비판의 중심적인 주장은, 진태원이 정당제
사상가나 철학자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는 인터뷰나 대담이라고 믿는 편이다. 이론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그렇다. 글로는 아무리 난해한 이론이나 사상이라 하더라도 저자의 육성을 통해서 걸러지면 덜 난해하다. 거꾸로, 말로도 이해가 안 되는 철학자라면 사실 읽어도 별 도움이 안 될 확률이 높다. 슬라보예 지젝도 마찬가지다. 좋은 입문서 역할을 해주는 책은 인디고연구소에서 진행한 인터뷰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궁리, 2012)인데, 그와는 별도로 참고할 만한 책이 글린 댈리의 『지젝과의 대화』(2004)다. 『불
롤랑 바르트는 1971년에 발표한 「작품에서 텍스트로」란 글에서 텍스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텍스트는 작품의 분해가 아니며, 텍스트의 상상적인 꼬리가 바로 작품이다. 혹은 텍스트는 작업이나 생산에 의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텍스트는 결코 멈출 수 없다(이를테면 도서관의 서가에). 텍스트의 구성 운동은 횡단이다(특히 그것은 작품을, 여러 작품을 관통할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텍스트는 읽기의 대상인 동시에 대상을 분석하는 주체적 행위자의 작업을 지칭하기도 한다. 즉 텍스트는 비평의 대상인 동시에 비평 행위
쉰다섯 살의 젊은 문호가 타계한 지 일 년 만인 1937년 10월에 루쉰을 신중국의 성인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옌안의 전사 마오쩌둥이다. 중일 전쟁이 터지면서 긴 항전과 내전에 돌입한 직후의 일이다. 얼마 뒤 전쟁터 한복판에서 미래를 설계한 유명한 논문에서 마오쩌둥은 낡은 중국의 콩쯔(공자)를 대신한 루쉰이야말로 위대한 문학가일 뿐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요 위대한 혁명가라 일컬었다. 이십 년 뒤인 1957년 3월에 마오쩌둥 주석은 만약 루쉰이 살아 있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공교로운 물음을 던졌다. 마치 집을 나간 노라가 어떻게
“기억은 수동적인 보관소가 아니라 의미를 창조해내는 적극적인 과정이다” (알렉산드로 포르텔리, “무엇이 구술사를 다르게 하는가”, 1991) 경험과 기억은 마치 시간적 차원에서 과거에만 국한되고, 경험과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측면에서 현재와는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재의 경험은 과거 경험의 연속선상에서 구성되고, 기억 역시 현재적 시점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된다는 점에서 경험과 기억은 역사성을 띠면서도 현재성을 갖는다. 포르텔리의 지적처럼 기억은 단지 과거 경험에 정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시점에서 그 경험을 해석하고 의
올해 초부터 전 세계는 피케티 효과로 뜨겁다! 40대 초반의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파리경제대학 교수가 쓴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장경덕 옮김, 글항아리, 2014)이 주인공이다. 영어로 695페이지, 국내서로는 820페이지에 이르는 대단한 분량의 이 책은 2013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것을 2014년 4월 하버드 대학 출판부가 출간하자마자, 전 세계 각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1세기 자본』의 요체는 이렇다. “자본 수익률이 노동 수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철학적 클리셰로 말하자면 악신(惡神)이 내 귓가에서 ‘확신할 수 있어?’라고 속삭인 탓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 거친 현실이 결국 펜을 들게 한다. 사회 곳곳에 드러나는 퇴행 현상은 우리가 21세기 민주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지 의심하게 하기 때문이다. 국가와 시민 사회 간에 음모론의 되먹임 현상이 끊이질 않았다. 천안함 음모론에서 세월호 음모론, 여기에 화답하는 종북 음모론까지. 음모론은 권력과 정보와 시선이 비대칭적인 한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의혹이다. 그리고 제기되었던 음모론 중에 음모가 실재했던 것도
미국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에서 인류의 역사는 폭력이 감소하는 방향으로 진행돼 왔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20세기가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기였다는 우리의 통념은 ‘역사적 근시안’의 산물이다. 게다가 20세기의 인구 폭발을 고려하면, 단순하게 희생자 수만으로 사건의 비중을 가늠해서도 곤란하다. 사망자 수로는 5500만 명이 희생된 제2차 세계대전이 최악의 사건이지만 당대의 세계 인구를 고려하여 3600만 명이 희생된 8세기 중국의 안녹산의 난이 가장 잔학한 사건의 자리를 차지한다. 당시 전체 인구
지금은 다시 또, 푸코의 시대다. ‘통치성’이나 ‘생명정치’의 푸코로 통하는 시대. 그러나 이 흐름을 은밀하게 좌우하는 것은 76~79년 강의 이전에 이루어진 강의와 저작들에 대한 재독해이다. 『정신의학의 권력』(1973~74년)은 18세기 말 이후 정신의학의 역사를 권력 문제를 중심에 두고 분석한다. 19세기 전반기에 피넬과 에스키롤의 실천부터, 뢰레가 대표자인 ‘도덕요법’의 국면을 거쳐, 신경학의 등장과 사르코 등에 이르기까지의 정신의학의 역사적 변천을 다루고 있는 이 강의록은 푸코의 ‘전후’ 저작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
무덤 앞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무덤을 바라보고, 쓸어보고, 끌어안고 하다가 종내, 그 무덤을 가슴에 담아버린 이들이 있다. 무덤을 가슴에 담으면 그 깊은 속에서 울리는, 무덤 속의 목소리를 안고 살아가야한다. 이론은 이를 트라우마라 부르고, 한국 땅에서는 이 주체를 ‘유족’이라 불러왔다. 무덤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하는 이들의 속내와 곡절을 탐구함에 있어, 박완서의 소설이 하나의, 영원한 원천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세월이다. 『나목』 옆에 , 『소년이 온다』(한강, 창비, 2014)를 놓을 수 있겠다. 홀로코스트, 위
악성루머는 경영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기업을 괴롭혀 왔다. 현대의 소비자 커뮤니케이션 환경에서 이러한 악성루머는 단순한 소문 수준에 그치지 않고 기업 경영활동에 위기 요인이 되고 있다. 최근에는 기업간 경쟁의 심화 및 제품에 관심을 갖는 소비자들의 증가하고 SNS, 스마트폰과 같은 뉴미디어가 부상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소비자들 사이에서 악성루머가 확산되는 상황에 처한 기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루머는 기업의 위기관리 차원에서 관리가 가능한 영역일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었다. 그것이
8월 26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무기한 휴전협상이 성사되면서 50일 동안 계속된 이른바 ‘전쟁’이 끝났다. 2143명의 희생자, 1만1천명 이상의 부상자, 10만 명의 피난민, 1만7천 채의 파괴된 가옥들을 남긴 채 말이다. 유엔에 따르면 희생자들 중 70% 이상이 민간인들이다. 레바논 일간 는 사망자 명단에 생후 24일 된 아기부터 99살의 노인까지 포함됐다고 전했다. 휴전 이후에도 이스라엘의 공격은 사실 끝나지 않았다. 휴전 협상 직후인 지난 9월초에도 이스라엘은 서안 라말라 인근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진
카프카의 주인공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결혼 기피증자들, 불면증 환자들, 불안증 환자들이다. 그 공통점들 중에는 ‘굶기’도 있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심지어 동물들마저도, 거식증 환자들이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도 결국에는 굶어죽고, 굴속에 들어가서 존재의 문제에 몰두하는 개도 단식을 하면서 생각에만 골몰한다. 하지만 이 굶기의 장인은 역시 카프카가 말년에 남긴 단편소설 의 주인공이다. 그는 서커스단에서 ‘굶기’를 공연한다. 철창 안에 앉아서 낮이고 밤이고 물 한 모금 안마시면서 사람들에게 굶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