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미소와 이해할 수 없는 박식함, 검은 옷과 검은 자동차만을 고집하는 취향, 스코틀랜드 혈통에다가 광부와 친척지간이라는 음험한 유전자. 영국의 한 주교는 이를 사탄에 홀린 사람의 특징으로 나열했다. ‘악’에 대한 단상은 터무니없고 모호하면서도 기괴한 모양을 하고 있는 하나의 엠블럼과도 같다. 그런데 책에서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이미지야말로 악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악의 특성을 명징하게 밝히는 한편, ‘악’과 ‘부정’을 구분할 것을 요구한다. 사실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적인 문제의식은 굉장히
국가란 무엇인가. 권영태의 「북한 헌법의 ‘국가목적규정’에 대한 연구」는 거대 사회 공동체로서의 국가에 대해 깊이 고찰한 글이다. 그는 북한 헌법을 그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면밀히 살펴 이를 관통하는 무언가를 찾아낸다. 논문 목차 순서와는 별개로, 그의 사고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국가’, ‘국가목적규정’, ‘혁명’, ‘인민’, 그리고 다시 ‘국가’라는 키워드에 차례로 주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그는 사회의 자율 기능이 그 힘을 잃을 때에는 여러 가지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에 사회의 자율 기능을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어떤
근래 인문학계에서는 ‘재일디아스포라’라는 표현이 곧잘 회자되곤 한다. 주지하듯이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용어는 원래 타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산(離散)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어로는 ‘민족 이산’ ‘민족 분산’으로 번역되는데 최근에는 “한 민족집단 성원들이 세계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는 과정뿐만 아니라 분산한 동족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와 공동체” 또는 “유대인의 경험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의 국제이주, 망명, 난민, 이주노동자, 민족공동체, 문화적 차이, 정체성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윤인진, 2003)
『이미지로서의 전후』는 표제 그대로 ‘전후’ 일본에 대해 말한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단순한 시대구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전후’라는 그 밀도 있는 단어에 함축된 신화적 의미들을 탐구한다. 다만 ‘전후’ 문제에 대해 논해왔던 대개의 논저들이 상징천황제의 성립과 우익사상의 변천, 경제성장 및 버블경제 붕괴 등, 다소 무거운 주제와 맞부딪치고자 했다면, 이 책은 대중매체의 발달과 더불어 일상생활의 국면에서 공유되는 ‘전후’의 표상들을 문제화한다. 즉 대중매체에 비춰지고 소비됨으로써 ‘전전’·‘전중’과 동떨어진 것처럼 유통되는 ‘전후
“최근 작가들은 서사와 자기 인생을 투영한 세계관이 모자라 작품에 철학이 빠져 있다”라는 한 원로 작가의 발언은 문학, 나아가 작가 개인의 ‘자기 철학’의 유효성에 관해 고심하도록 만들었다. 문학은 작가가 살아가면서 경험한, 잘 갈무리한 자신만의 가치관을 오롯이 담아내 “돌아보는 시선”을 제시하는 예술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그의 저서 『정치적 무의식』에서 393페이지에 걸쳐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정치적 무의식』에서 작가는 현실을 취급 가능한 기록물로 손쉽게 환원시키기보다 오히려 현실의 모순을 건드리고
나는 스물세 살에 문예창작과에 입학을 했다. 합격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받은 사람은 어머니였는데, 그제야 딸이 문예창작과에 몰래 입학시험을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문학이라니! 그때까지 가족들은 딸이 문학 언저리를 맴돌고 싶어한다는 것을 몰랐다. 그때의 분위기는 요즘 같지 않았고, 그래서 이십대 청춘들에게 이런 말을 하기는 좀 미안한데, 나는 그 당시 미래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뭐라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뭐가 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다. 나는 뭐든 게 재미있었다. 처
9월 12일 만해관 258호에서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라는 영토, 식민지 근대와 제국주의라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삶을 영위해갔던 재일(在日)조선인들의 ‘자기서사’에 주목하여, 국가주의의 기억 속에서 집단화되었던 재일조선인들이 창출한 자기 구축과 기억, 에크리튀르의 문제를 보다 복합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천착한 연구물들이다. 이번 학술대회를 기획한 ‘재일조선인 자기서사의 문화지리’ 연구팀은 재일조선인을 “국가의 규율권력 내부에서 그 규율에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에 의해 재해석된 이래로, 18세기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이 제안했던 감옥 건축 모델인 파놉티콘(Panopticon)은 특히 국가에 의한 감시와 관련하여 권력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확립되었다. 이때 파놉티콘 체제의 핵심 원리란 ‘모든 것을 본다’는 권력, 혹은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가 ‘모든 것을 듣는다’는 권력 내지는 능력을 추가한다면, 우리는 마치 파놉티콘이 단지 사회의 이상적 원리가 아니라 그 자체로 현실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유럽의 현대성이 처절하게 실패한 중심(독일)에서, 현대성이 선사한 정신의 정수인 합리적 이성과 계몽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현대적 개인들 간의 대화적 관계를 중심으로 현대사회의 기원을 말한다. 문제는 하버마스가 합리적 이성을 갖춘 현대적 개인의 기원을 남성 부르주아로 상정한다는 점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유럽의 18세기 계몽시대가 선사한 합리적 이성사회는 부르주아적 공·사 관념과 이해에 기반하여 성립된 것이다. 원활한 상업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공통된 규약의 규범은 공론장(public sphere)에서의 합리
사랑하는(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속수무책의 이별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이별이란 것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 주름’을 만들어놓는지를. 롤랑 바르트는 “나의 삶은 애도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말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그것은 마치 ‘모두 함께 현재의 날씨를 관찰하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날씨에 대해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데에서 오는 고통, 첫눈을 보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고 자기만을 위해 그것을 간직할 수밖에 없는
‘내 인생의 책’이란 무엇일까. ‘삶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책’이라는 뜻이라면 먼저 국정교과서와 만화책들을 꼽아야 한다. 농담이 아니다. 의무감에서 읽은 교과서들의 문장이 나를 형성했다는 것은 적어도 무의식의 차원에서 진실이다. 우리는 여전히 교과서라는 상징적 패러다임의 자장 안에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이 교과서적 패러다임을 변경시키고, 확장시키고, 부수고, 그 바깥으로 길을 내는 행위이다. 대학시절로 돌아가면, 우선 1987년에 출간된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이 떠오른다. 엥
동서사상연구소 주최 춘계학술대회 〈청년들이 살아갈 사회 기획하기〉가 5월 14일 우리 학교 문화관 4층 초허당 세미나실에서 개최되었다. 미래를 위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취업난 등으로 암담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 관해 논의하며 이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기성세대들이 함께 모색하자는 것이 학술대회의 취지였다. 발표자들은 청년들의 미래, 생존 전략에 대해 함께 논의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먼저 최인숙(동국대 철학과) 교수는 〈청년들이 살아갈 사회와 대학의 공공성〉이라는 제목 아래 ‘대학에서 개인적 공부가 아닌
세월호 이후 ‘이후’라는 이 단어는 하나의 낱말에 불과하지만 꽤 복잡한 의미망을 포함하고 있다. 작년에 필자는 김남주 20주기를 맞아 발표한 글 「김남주 이후」(『실천문학』 2014년 봄호)에서 ‘이후’의 의미론에 관해 몇 마디 단상을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을 실마리로 삼아 ‘세월호 이후’라는 말의 몇 가지 뜻을 풀어보기로 하자.첫째, 이후는 당연히 시간적인 의미에서 다음에를 뜻한다. 2014년 4월 16일 일어난 세월호 사건, 그 이후의 시간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둘째, 하지만 이후라는 말은 시간적인 다음에를 넘어서, 어떤 상징
가 총 6주간(3월 12일∼4월 16일)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릴레이 공감 토크’라는 기획의 일환으로 마련된 이번 강연은 ‘분단의 행위자-네트워크와 발분단의 사회동학’이라는 연구 주제로 SSK사업을 수행 중인 우리학교 분단/탈분단연구센터(연구책임자 박순성 북한학과 교수)에서 주관한 행사이다. 이번에 개최된 릴레이 공감 토크는 분단을 번역하고 수행하는 실재로서 분단의 서사들과 사물의 정치를 조명하고, 분단을 번역하는 중심에 있는 ‘안보’, ‘통일’, ‘민족’ 등의 주제어에 주목하여 분단/탈분단을 재인식하
사적인 고백 하나. 아직은 장래 나의 연구가 학계와 사회에 유의미하게 축적되길 바라며 하루하루를 근근히 버텨내고 있을 뿐인 지망생 신분에 불과하지만, 나는 문학을 연구하는 것이 (아직까지는) 너무나 즐겁다. 문학이 근대의 미적 이데올로기로서 국민국가 형성에 이바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반박하기 난망한 정설에 가까운 학제적 추측(conjecture)에 멈춰서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쯤되면 (한국에서 대체로 그렇듯이) 아직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고 믿어지는 참신하고 저명한 외국 이론의 소개로 이 난국을 타개할 차례이다. 민족문학 연구로 더
콜롬비아의 대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그의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의 말미에서 1955년 기자 생활을 하던 도중 화물선 한 척이 갑자기 크게 기울어 탑승자가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한 사건에 대한 폭로 기사를 썼음을 고백한다. 마르케스는 생존자의 기억을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한 기사를 통해, 공식적인 해명은 제대로 하지 않고 폭풍이 사건의 주원인이라는 입장만 내세우는 정부를 신랄히 비판한다. 이로 인해 그는 이후 유럽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최근 마르케스의 유명한 말을 공식석상에서 인용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내게 같은 책을 두 번 이상 읽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근사한 책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지만 나중에 다시 읽는 일은 거의 없다. 처음으로 읽으며 감탄과 전율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 완벽한 순간이 다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여운을 즐기는 쪽이 훨씬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몇 권의 책들은 다시 펼치게 된다. 주로 용기가 필요할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고 나 자신에 대해 믿음이 없을 때 그러하다. 로버트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 하인라인의 SF를 읽으면 언
얼마 전 일본의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이라는 책이 한국어로 출간되었다. 『세계사의 구조』에서 정점에 이른 가라타니 고진의 체계적 사상을 통해 이미 우리는 가라타니가 소망하는 세계의 모습을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같이 소망해도 나쁘지 않을, 영구평화가 실현되는 세계공화국이다. 그런데 그러한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말년의 가라타니는 이제 이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이소노미아. 이 낱말은 “동등한”을 뜻하는 isos와 “법”을 뜻하는 nomos에서 온 말이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는 1947년 「문헌학과 세계문학」(Translated by Maire & Edward Said, Philology and Weltliteratur ,The Contenial Review 13.1(1969), pp1~17. )이라고 이름붙여진 강연에서, 당시 미·소 양강체제로 규격화되는 정치와 일원적으로 경도되는 과학적 사실에 대항하여 역사의 다양성과 인간의 모험과 잠재성을 드러내는 학문으로서 문헌학의 현대적 가능성을 주장한다. 그의 문헌학적 테제는 인간이 남긴 사적 기록물의 혼란스러운
조정환의 『예술인간의 탄생』은 ‘예술진화론’의 입장을 통해 현대 인지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예술 과 인간형의 변화, 다중-예술가와 ‘예술인간’의 등장 등을 탐색하고 전망한다. 특히 예술종말론과 예술진화론에 대한 계보학적·비판적 탐구가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데, 여기서 근현대 사상가들 이 제시한 예술론의 핵심이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통해 설명되고 있다. 조정환은 68혁명의 열기와 연동된 아방가르드(플럭서스)의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슬로건을 자본이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전용했는지, 그러한 전용이 산업자본주의의 인지자본주의로의 전